[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3.01.2021

 


 

직장생활을 하면서 5일간의 평일이 지난 뒤 어김없이 주말이 찾아와 줄 것을 머리로는 알며서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을 자주 느꼈다.

드디어, 다시 찾아온 토요일이다.
주말만을 붙들며 살아가고 있을 직장인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을까?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열과 성을 다하여 악착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의자다. 지난 5일동안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버려서 최소 2일은 오롯이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이쯤 되면 도무지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에 대체로 부정적인가?
내게 있어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며 평범하게,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진정 난 몰랐다. 한편으로는 참 모순적인 것이,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 주류의 대다수가 살아가는 방식대로 나도 따라붙여가며 살아가고 싶어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모든 우울과 내 내면의 모든 비극적인 감정들은 이 패러독스에서 출발하는 것 같을 정도다.

노동하는 삶, 누구나 다 하는 노동 나라고 왜 예외를 두겠는가?
너만 일하는 것이 힘드니? 나도 힘들다. 너만 그런 것 아냐. 어른이되면 자기 생활은 스스로 책임 질 줄 알아야지. 왜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야? 생각을 바꿔봐. 태도를 바꿔봐. 네가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그 상황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바꿔봐.

솔직히 이런 말들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외국에 사는 외국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것 같은가? 천만에. 토씨하나 안틀리고 똑같은 말을 그저 다른 언어로 읊어줄 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좌절감이 들었다. 단순히 좌절감만이 들었을 뿐만아니라, 결국 모든 것은 다 내 마음가짐 탓이라고 모든 것은 다 내 탓이고, 그래서 나만 하나 변하거나 못변하겠으면 나만 하나 입닫고 국으로 가만히 있으면 온세상이 평화로워 질것이라는, 그래서 유난떨지말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 할수록 미치게 외롭고 서러웠다.

 

나도 많은 다른 밀레니얼들과 다르지 않게, 삶에서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다. 의미를 못찾겠으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서라도 붙이라고들 하는 마당에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여전히 희뿌연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나는 왜 일을 하며, 지금 왜 하필 나는 이런 일을 하고있는가?

 


 

나는 한국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그 "수저계급론"에 입각하여 보자면 흙수저 출신이다.
내가 최근에 알게 된 한 유튜버가 있는데 그분의 흙수저 정의 영상을 보면 또 아주 흙수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안도감과 또 퍽 우습게도 불안감(?) 마저 든다. 안도감이라면, 그래도 아주 흙수저는 아니라면 한 플라스틱 수저쯤은 되려나 하는 기대이며, 불안감이라면 어쩌면 흙수저 그룹에라도 못들면 어쩌나 하는, 다시말해 어느 쪽이 되었든 좋을 건 없다.

사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가나기도 했다. 부모님에게 화가나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그냥 그 상황이 싫었던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느정도 종잣돈을 안고 출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생각보다 참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것은 시간적, 심리적 여유와 맞바꿀 수 있는 여유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돈 그 자체보다도 바로 그 시간적 심리적 여유,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만날 수 있는 (물론 아주 극단적으로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선택권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맞지않는가) 그 자유가 너무 갖고싶다.

그런데 나는 현재 그걸 가질 여건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해야한다. 자아실현이나 그런 부차적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일은 생계유지를 위해 해야하는 것이다. 사실 일을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생각보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이 현실앞에서 나는 매우 자주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유지해야 할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선택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자꾸만 날더러 그 상황에 나를 끼워맞춰야만이 그 수단을 그나마 연명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현실을 살고있는 것이다.

나라를 바꿔서 어디를 가든 이 명제만은 변하지 않았다.
외국인 신분으로 산다면 더더욱 더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중요해진다.


 

작년 여름 코로나로 관청들의 업무마저 마비가 되던 시절, 내 마음속 최후의 마지노선이던 여름까지 영주권을 받지 못할까봐 마음 졸이던 모든 나날들을 뚫고 극적으로 나는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다. 막상 그 자그마한 플라스틱 카드를 수령하고 돌아오는 날 나는 생각보다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음에 놀랐다. 그 영주권이 있는 한, 앞으로 생업 선택의 폭은 넓어질 수 있다. 우선 이것으로 나는 매우 안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론적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맞지만 질적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거르고 걸러내고 나면 남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민 초창기 시절에는 하던 일이 나를 물먹이고 온 세상이 작당모의를 해서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 것 같을 때, 이놈의 영주권만 따봐라 그 바로 다음날에 사표를 던지고야 말거라며 배짱을 부렸더랬다. 그런데 막상 꿈에 그리던 영주권을 손에 넣고 나서도 사실 나는 별로 큰 선택지나 솔루션이 없다는 사실에 슬그마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직장을 때려 칠 위기가 빈번했던 작년 한해동안 영주권을 받고 나서도 막상 그만두지 못한채 올해로 넘어오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나에게 일의 의미는 결국 일차적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대가로 해야하는 일인것이다. 한국에서 흙수저였건 그보다 한계단 위 플라스틱 수저였건 한번 그 수저를 물고 살면 어느 나라에 가서 살건 그 수저는 따라온다. 나는 이나라에서는 더욱이 내가 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기에 입에 문 그 수저라도 잘 간수하며 내 입안으로 들어갈 밥은 내가 벌어 먹여넣어주며 나 자신을 부양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냥 아무일이나 하기에는 내 성격의 지랄맞음이 어디 저제상 수준의 지랄맞음이 아니던가?

모든 삶의 애로사항들은 다 내 성격에서 기인되는건가. 성격은 바코드같은걸까. 사주팔자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내 똥고집으로 그 성격을 바꾸려고도 안하는 것을 보면 정말 두손두발 다 들어버리게 된다.

 

이 일은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입맛대로 맞는거 없다는 거 잘 알지만 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에서 도리질을 친단말이다.

내 외국인 이민자로서의 특수성.
완벽하지 못한 현지언어.
그리고 이 지랄맞은 성격의 쓰리콤보로 나는 그래도 곧죽어도 어느 랜덤으로 걸려들지 모를 아무개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내 자존심을 무너뜨려가며 살고싶지 않다. 그렇다고 한국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으래도 큰 틀에서의 차이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언어 정도는 잘 통하겠지만.

그럼 생계도 유지할 수있으면서 일도 심적으로 덜 끄달릴 수 있으면서 보수도 아주 박하지 않으면서 가급적이면 집에서 혼자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구할수만 있다면 어쩌면 나는 이 100일이 다 지나기도 전에 사표를 제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흙수저이기만 한 것은 어쩌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흙수저라도 자기에게 많은 재화나 좋은 위치를 가져다 줄 확실한 기술이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것이다. 그러나 이 수저를 물고 있는 상황 위에 한가지의 상황이 더 얹힌 것이다. 이 세상적 잣대로 봤을때, 특히 전세계적으로 이런 경향이 심화되는 가운데, 나는 소위말하는 "문송한" 사람이다. 문과 나와서 죄송한 사람.

나는 단 한번도 내 문과 전공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공부하는 동안 사랑했던 그 문과의 자질들이 직업시장에 들어가면 그런 공부를 한 사람들이 가지게끔 매칭된 직업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의 개인 성향과는 정 반대되는 자리에 있었다.
나는 공상을 하고 글을쓰고 특히 문학적 글들을 좋아했는데, 글을 좋아하거나 잘 쓰거나 하는 사람이 주로 담당한다는 기업내의 커뮤니케이션 부서 등등은 늘 남을 위해 그 일을 해야했고 나의 글이 아닌 남의 생각을 돋보이게 써주는 일이었다. 그것에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글쎄 나는 내가 내 글을 내 이야기를 쓸 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학생시절때에는 몰랐던 것이다. 그저 취업만 시켜주면 나는 뭐든 할 자세가 되어있다고 생각했으나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내 개인의 아이디어대로 누구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 없이 그걸 바탕으로 혼자 고민하고 썼다가 지웠다가 통째로 갈아엎더라도 결제를 올릴 일도 없는 그런 모든 창작의 과정에 내 손길이 어느 한군데 안미친 곳이 없는 그런 일을 해야 행복한데, 그런 일을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창작물이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데서 오는 좌절감이 가장 근원적인 업무불만족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일 하라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내게 있어 일의 목적이 되는 "생계유지"라는 측면이 심각하게 손상 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가서, 나는 흙수저나 플라스틱수저 그 중간 어디쯤이라 내가 내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공장이 문을 닫게 되는 상황이라서. 그래서 찬물 더운물 가리는, 골라잡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흙수저에 문과출신.
그런데 나는 어찌하다보니 소프트웨어 개발자 같은 테크니컬한 IT인력은 아니라지만 IT부서 짬밥 도합 근 4년차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한방이 되어줄 하드코어한 IT적 기술은 없는 상태다. 그 원천기술, 필살기가 있어야 프리랜서 프로그래머가 되든 데이터 분석가가 되든 뭔가 더 혼자서 몰두해서 조용히 코드짜고 분석하는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과의 특성, 글과 말 즉 커뮤니케이션이 중시되는 직종의 일들은 대부분 진입장벽이 낮은 신입 말단적인 일들이면서 상당히 반복적인 오퍼레이션 어드민적인 일들, 다시말해 내가 지금까지 요리조리 피해가면 갈수록 끈덕지게 따라붙는 일들이었다. 대신 내 내향적이고 몰두하기 좋아하는 엉덩이 무거운 성격에 더 적합한 직종으로는 차라리 IT 전문인력들이 하는 그런 몰두해서 계산하거나 분석하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일들이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라고 해서 왜 사람과의 협업이 없고 스트레스가 없겠느냐마는, 적어도 내가 겪어왔던 차원의 그런식의 대인기술을 요구하지는 않는 일이다.

 불일치. 이 불일치를 학교 다닐때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사회에 나와 한국과 외국에서 모두 살아내며 온몸으로 부딪혀가면서 깨지고 오열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가며 겨우 깨우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이 흥미와 적성이 있고 좋아하는 것을 전공으로 택해 공부했다 할지라도 그 좋아해 마지않는 전공적 지식 및 소양으로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말도 안되게 들리는 말을 나는 이제는 온몸으로 겪어내었기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해도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임노동을 통한 제화의 획득 이외의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가진것도 없고 원천기술도 없으면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있었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둥글고 긍정적이고 그러다못해 심지어 “까라면 까”일줄 아는 멘탈, 안정된 정신건강이다. 나같이 쥐뿔도 없는 사람에겐 이게 가장 큰 자산이 되어줄 수 있었을텐데.

내겐 이게 가장 심각하게 부재했다.


추신:

언젠가 나에게 힘이 되어준, 나를 살린 유튜브 및 팟캐스트 채널들을 언급하고 싶어서 따로 다른 날 작정하고 관련 내용을 다루고 싶지만. 끝으로 오늘은 내가 최근에 걸크러쉬를 느끼고 반해버린 촌철살인 유튜버 "김알파카"님의 채널<썩은 인생> 에서, 위에 언급한 흙수저 정의를 주제로 한 에피소드 영상을 나누고 싶다.

 

 

https://youtu.be/vy2qkP1HEns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2.01.2021

 


 

마치, 헛된 희망 같다고 할까요?
.....
헛될수록 비싸고 달콤하지요.
그 찰나의 희망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답니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中 쿠도 히나의 대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9회 속 장면: 쿠도 히나는 마주한 박애신과 가배(커피)를 들며 "헛된 희망"에 대해 읊조린다.

 


 

헛된 희망.
헛됨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덧 없는 것? 현실성이 없는 것?

이 이민생활은 나에게 헛된 꿈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지속 가능한 현실일까?

희망을 가지는 것.
그리고 걸었던 희망을 잃는 것.
실망하는 것. 모든 희망을 잃고 금새 좌절하는 나라는 사람.
나는 무엇을 위한 무슨 희망을 걸어왔던 것일까?

 

오늘은 어제 있었던 상사와의 콜의 연장선상으로 매월 1회 포트폴리오 현황 보고하는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상사와, 그 상사 아래 하나의 팀을 맡고있는 팀장 한명, 그리고 자기 관할 주요 프로젝트가 많은 부서 내 프로젝트매니저 한명, 그리고 나.

올해 들어 처음 하는 보고미팅이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 한 가운데 내용은 별 무리 없이 진행 해 나갈 수 있었다. 어제까지 시안 준비해오던 포트폴리오 컨셉관련 슬라이드는 몇몇 개선점들 피드백도 받았다. 생각보다 내가 아직 아주 완벽하게 흠잡을데없이, 매끄럽게 진행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스스로가 노래노래 불렀던 컨셉 제안하는것도 본인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 보다 실재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좌절감을 빨리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종류의 업무도 사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는 업무가 있기는 한걸까?
이것은 순전히 나 자신때문인걸까? 아니면 조금 다른 셋팅, 조금 다른 식의 조직이었다면 충분히 차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 마음 깊은 곳에다 대고 나는 사실은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이 업무를, 이 조직 내에서 이 부서내에서 이런 세팅 속에서 열과 성을 다 바쳐서까지 스스로를 개선시켜내고 어떤 한 획을 긋고 싶기는 한거야? 아니면 이 일이라도 한 번 어떻게 발전시켜서, 기존의 하기싫은 다른 종류의 일을 할때 드는 우울감을 상쇄시켜보려고 개중에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 여기에 빨대라도 한 번 꽂아보려고 하는거야?
정말로 이쪽 계통으로, 이쪽 분야로 나가고 싶어? 네가 그동안 그렇게 집착해왔던 이민자로서 현지 직업시장에서 각광받을 수 있을 분야로 스스로의 적성을 애써 맞추면서 그렇게 억지로 단련하고 있는거 아니야?


내가 걸었던 희망들, 그래 컨셉잡는 일을 하면 내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다 좋아해줄거야, 나는 내 아이디어를 잘 전달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어, 나는 창의적이야, 나는 똑똑하고 야무져, 나는 철두철미한 일을 해 내는 사람.. 기타등등,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런것들은 쿠도 히나의 말처럼, 개화기 시절 허영의 상징이었다던 가배같이 그런 허황되고 과장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어보이지만 실속은 없을지도 모를, 그렇고 그런 헛된 희망들이었을까?

나는 이런 일들 (사람들 대하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일들) 하기싫어하고, 늘 그런 것들에 불안감과 부담감을 느끼니까- 그에비해 천만다행으로 혼자서 생각해서 아이디어 짜내는 일, 기존에 없거나 정립이 미흡한 상태인 프로세스들 한데 모아서 엮는 일들을 좋아하니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얻게되면 나는 날개를 단 것 같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렇게 나의 못하는 부분들을 늘 요구받아야했던 업무들만을 대체로 해오던 나의 상처입고 억눌린 내적 자존심의 회복을 꾀하기 위해 나는 그런 희망들을 부풀려 생각해왔던 것일까?

애초부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목적의식에 입각한 희망, 전망, 기대가 아니었기에 조그마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희망들은 부서진다. 되려 그렇게 부서진 희망이라는 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져내리고 나면 남는 내 빈곤한 마음, 상처입고 불안정하고 어떻든 어떻게 해서든 내 허영기를 채워줄 좀 더 고상하고 품격 높은 일을 해 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을까봐 벌벌 떠는 자의식만이 드러난다.

 

 

 

처음엔 쓴맛만 나던 것 어느 순간 시고 고소하고 달콤해지다가 점차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밤에 잠까지 설치게 만든다는 헛된 희망 같은 것.



 

나는 부여잡을 것이 필요했다.
붙들 것이 필요했단 말이다. 지금 현실이 이러하니, 그래도 주어진 것들 중에서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까 이런 정도 쥐고 있으면 나쁜 패는 아닐 거 같으니까. 기왕이면 그냥 '나쁜 패는 아닐거 같으니까'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패이기를 바라고 그 패로 어떻든 한 몫 잘 챙기면서 이 판에서 한 번 이겨보자는.. 이를테면 그런 심보 말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나에게 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일을 하고 싶기는 한 걸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그것을 하고싶어하는 걸까?



헛된 희망을 들이키려 하는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래!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은 내가 이 회사에서 원하는대로 해 보고 나간다!"


오기에 받쳐있었던 때였다.


1. 조직내에 인터내셔널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들도 분명 있다. 
한번은 기필코 그런 팀에서 다녀볼거다. 그래야 이게 명색이 글로벌한 기업이지. 어디 죄다 팀에 걸려도 순 그런데만 골라서 걸렸나 몰라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는거냐 싶었다.
2.  내친김에 여기서 다른 나라로 출장도 한 번은 가보고 싶다.
3. 프로젝트매니지먼트쪽이 수요도 많고 프로젝트 체인지매니지먼트 하면서 어깨넘어로 익힌게 있으니, 좀더 시작은 프로젝트코디네이팅 정도지만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에 차라리 밀착해서 가까이서 숨가쁘게 일하면 적어도 이력은 더 붙을거야.
그래서 이력서에 그런 관련 직책, 직무, 한줄이라도 남기고야 말겠다!

 

그당시 나는 반.드.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거실 벽에 A4용지를 여러장 이어서 거의 전지만한 크기의 백지를 만든 뒤 구호를 적어 붙였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것이다!!!!
나는 해 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똘기라도 없었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현재 포지션을 사내 커리어마켓 웹사이트에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같은 IT부서인데 각종 재무회계 비즈니스프로세스를 디지털적으로 구현시키는 일을 맡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구매관리를 위한 새로운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와 긴밀히 일하며 로젝트 코디네이션을 하고 일정관리, 프로젝트 스케쥴 관리, 예산관리, 컨설팅회사 등 외주 직원들의 비용 인보이스 관리 등을 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그 ERP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정말 직업시장에서 금싸라기라고 불릴 IT 프로젝트매니지먼트 분야 그리고 ERP 분야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며 이전의 그 어떤 포지션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이력서를 업그레이드 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서의 어시스턴트에게 그 포지션에 대한 정보를 문의했고 그는 바로 현재의 상사가 된 그당시 그 부서장으로 갓 부임해온 그에게 나를 연결시켜주었다. 우리는 전화통화로 처음 만났으며 전화통화 뒤 그는 이력서를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우리는 대면 면접으로 다시 만났다.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현지인이 아닌, 나처럼 외국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앞으로 자신의 팀원을 최대한 다국적으로 채용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상사인 자신이 죄다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조직을 잘 통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번 목격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출신으로 대기업의 한 부서에 간부의 자리로 스카웃되어 온 사람이고 그 말인즉 그는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느낀바가 한 가지 있는데, 현지인 직원들은 다들 엇비슷하게 평균적이라면 타국 출신의 직원들은 동일직급내, 동일 연령대 현지인들과 비교해서 아주 스마트하고 목표지향적이며 이미 본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재 퍼포먼스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루즈하고 자기 몫만 챙기고 깰짝거리듯 일하고 뻑하면 아프다고 병가내고 또 너무 일을 열심히 많이 잘하기라도 하면 시기질투나 하는, 자기가 나고자란 고향 근처 도시에서 대학나오고 또 그 대학나온데 근처 도시인 이 회사에 자리하나 얻어서 마치 정년퇴직 할때까지 다닐 기세로 사는 사람들과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 다수의 팔자좋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기세좋은 말빨로 자신의 무능함을 자기합리화하며 유능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질투와 견제가 굉장히 심했다. 거기다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경직되고 낡아있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대체로 평탄한 인생을 누리며 살아온, 소위말하는 선진국이라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민족들이었다.


또한 상사는 새로 부임해와서 그당시 자신의 담당 부서 내 많은 공석들을 계속 채용해야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말인즉,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직원들, 즉 아주 프레쉬하게 외부의 지원자들을 뽑아서 이 부서를 채워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엄청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적중했다. 그는 발군의 실력으로 아주 유능한 인재들로 팀을 채워나갔고 그가 불러모은 팀원들은 과연 똑똑하고 여유롭고 자상하기까지한 배울 점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뽑아 꾸린 팀은 나날이 성장하는 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초기에 얘기했던 "단순히 프로젝트 어시스턴트 적인 프로젝트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정말 프로젝트매니저와 파트너처럼 일하는" 그런 식의 그림에서부터 애석하게도 점점 멀어져갔다.


 

왜 매번 이렇게 될까?

이렇게 되고 마는데는 전부 다 내탓인걸까? 막상 쥐뿔도 없는애여서? 그래놓고 원하는 건 저 높은데 있는 욕심만 앞서고 실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걸까? 나는 스스로의 인지능력 및 지적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굉장히 초라하고 풀죽고 불안하게 어긋나가게 되었다.


초반에 약속했던 그 ERP시스템의 트레이닝도 내 몫은 없어졌다. 이전에는 나도 트레이닝을 받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으나 상사는 말머리를 슬그마니 돌렸다. 이쯤되어 낚였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트레이닝 기회는 좀더 그 툴을 테크니컬하게 다룰 다른 동료들에게로 가버렸고 나는 점점 더, 그냥 단순한 프로젝트 아웃룩 일정들만 포워딩하거나 기타 그런 일들만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다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기시작했다.


팀원들도 아주 여러명인데, 특히 비즈니스쪽에서 온 팀원들은 나는 프로젝트매니저의 비서쯤으로 여겼다. 내가 뭔가를 도입하려하거나 다른 시도를 하려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마치 내가 원래 내가 해야하는 그런 그들의 "시다바리"가 되는 일을 안하고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으며 점점 더 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그래도 첫 프로젝트의 타겟 국가인 나라로 도합 2번이나 팀원들과 함께 출장도 다녀왔다.
국제적인 팀, 출장, 다 이뤄냈다.
내 초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점은 여전히 마음에 크게 남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내가 만나본 역대 직속상관 중에서 지금의 상사는 쿨한 사람이고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프로페셔널 레벨로 반해있다. 그는 내가 벌써 지금까지 여러번 드러낸 불안감, 하고싶지 않은 일들만 계속 하게되고 내가 생각보다 예산관리도 이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대해서도 인정해주고 나를 똑똑한 사람인것처럼 말해주고 달래주었다. 그점은 지금도 잊지못하고 그래서 지금도 퇴사를 결심하겠다고 하고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프로젝트팀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겟 국가들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작고 초라해졌으며 뒤안방으로 물러나 정말 팀원들의 어드민적 일만 어레인지해주는 수준이 되어버렸고 그사이 맡게된 부서내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징이라고 내가 고집스럽게 쓰지만 사실은 팀내 총무자리가 공석이라 총무가 해야했을 프로젝트 비용 보고에 관련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며 점점 더 마음적으로는
이 프로젝트 팀에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더 이 프로젝트 포르톨리오 매니징이라 이름붙인 업무에 "영끌"이라는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나 녹여가며 이사람 저사람 컨텍해가며 쪼으고, 문의하고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단순 오퍼레이션이 아닌 그 한단계 윗 레벨로라도 올려서 체계를 잡아가려고 분투중이었다.

 




새해는 이제 갓 시작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부서에서 일했던 것과 꼭 같은
1년 9개월째를 살아내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짧막한 이력들로 도배가 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내 이력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얼굴에 면을 세울 수 있는 최소 2년을 채우게되는 4월 말까지 100일의 시간을 줘보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4월은 의미가 깊은 달이다.
이 회사에서 매년 4월달에는 전년도 업무평가와 회사의 한해 수익률 달성정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달이다. 만일 정말 4월까지 해서 징글징글한 "최소 2년"을 채우고나서 CIO가 떠난다는 그 5월에 나도 퇴사통보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보너스는 챙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오늘 나는, 상사와 업무 관련하여 전화통화가 한 번 있었고 우리의 대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그와 이야기할때면 늘 긴장한다.
헌데 너무 괜찮은 대화였다. 내가 악착같이 집착하는 그놈의 그 기획, 그놈의 얼어죽을 컨셉만들기... 오늘 내가 만들고 있는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컨셉 그래픽 시안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또 희망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희망일까? 올바른 희망일까?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있는걸까?
올해는 그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는 불안할까?
업무 외적인 것들을 놓고 봤을 때, 구체적으로 직장생활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자주 괴롭게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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