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래!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은 내가 이 회사에서 원하는대로 해 보고 나간다!"


오기에 받쳐있었던 때였다.


1. 조직내에 인터내셔널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들도 분명 있다. 
한번은 기필코 그런 팀에서 다녀볼거다. 그래야 이게 명색이 글로벌한 기업이지. 어디 죄다 팀에 걸려도 순 그런데만 골라서 걸렸나 몰라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는거냐 싶었다.
2.  내친김에 여기서 다른 나라로 출장도 한 번은 가보고 싶다.
3. 프로젝트매니지먼트쪽이 수요도 많고 프로젝트 체인지매니지먼트 하면서 어깨넘어로 익힌게 있으니, 좀더 시작은 프로젝트코디네이팅 정도지만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에 차라리 밀착해서 가까이서 숨가쁘게 일하면 적어도 이력은 더 붙을거야.
그래서 이력서에 그런 관련 직책, 직무, 한줄이라도 남기고야 말겠다!

 

그당시 나는 반.드.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거실 벽에 A4용지를 여러장 이어서 거의 전지만한 크기의 백지를 만든 뒤 구호를 적어 붙였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것이다!!!!
나는 해 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똘기라도 없었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현재 포지션을 사내 커리어마켓 웹사이트에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같은 IT부서인데 각종 재무회계 비즈니스프로세스를 디지털적으로 구현시키는 일을 맡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구매관리를 위한 새로운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와 긴밀히 일하며 로젝트 코디네이션을 하고 일정관리, 프로젝트 스케쥴 관리, 예산관리, 컨설팅회사 등 외주 직원들의 비용 인보이스 관리 등을 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그 ERP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정말 직업시장에서 금싸라기라고 불릴 IT 프로젝트매니지먼트 분야 그리고 ERP 분야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며 이전의 그 어떤 포지션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이력서를 업그레이드 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서의 어시스턴트에게 그 포지션에 대한 정보를 문의했고 그는 바로 현재의 상사가 된 그당시 그 부서장으로 갓 부임해온 그에게 나를 연결시켜주었다. 우리는 전화통화로 처음 만났으며 전화통화 뒤 그는 이력서를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우리는 대면 면접으로 다시 만났다.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현지인이 아닌, 나처럼 외국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앞으로 자신의 팀원을 최대한 다국적으로 채용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상사인 자신이 죄다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조직을 잘 통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번 목격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출신으로 대기업의 한 부서에 간부의 자리로 스카웃되어 온 사람이고 그 말인즉 그는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느낀바가 한 가지 있는데, 현지인 직원들은 다들 엇비슷하게 평균적이라면 타국 출신의 직원들은 동일직급내, 동일 연령대 현지인들과 비교해서 아주 스마트하고 목표지향적이며 이미 본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재 퍼포먼스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루즈하고 자기 몫만 챙기고 깰짝거리듯 일하고 뻑하면 아프다고 병가내고 또 너무 일을 열심히 많이 잘하기라도 하면 시기질투나 하는, 자기가 나고자란 고향 근처 도시에서 대학나오고 또 그 대학나온데 근처 도시인 이 회사에 자리하나 얻어서 마치 정년퇴직 할때까지 다닐 기세로 사는 사람들과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 다수의 팔자좋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기세좋은 말빨로 자신의 무능함을 자기합리화하며 유능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질투와 견제가 굉장히 심했다. 거기다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경직되고 낡아있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대체로 평탄한 인생을 누리며 살아온, 소위말하는 선진국이라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민족들이었다.


또한 상사는 새로 부임해와서 그당시 자신의 담당 부서 내 많은 공석들을 계속 채용해야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말인즉,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직원들, 즉 아주 프레쉬하게 외부의 지원자들을 뽑아서 이 부서를 채워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엄청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적중했다. 그는 발군의 실력으로 아주 유능한 인재들로 팀을 채워나갔고 그가 불러모은 팀원들은 과연 똑똑하고 여유롭고 자상하기까지한 배울 점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뽑아 꾸린 팀은 나날이 성장하는 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초기에 얘기했던 "단순히 프로젝트 어시스턴트 적인 프로젝트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정말 프로젝트매니저와 파트너처럼 일하는" 그런 식의 그림에서부터 애석하게도 점점 멀어져갔다.


 

왜 매번 이렇게 될까?

이렇게 되고 마는데는 전부 다 내탓인걸까? 막상 쥐뿔도 없는애여서? 그래놓고 원하는 건 저 높은데 있는 욕심만 앞서고 실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걸까? 나는 스스로의 인지능력 및 지적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굉장히 초라하고 풀죽고 불안하게 어긋나가게 되었다.


초반에 약속했던 그 ERP시스템의 트레이닝도 내 몫은 없어졌다. 이전에는 나도 트레이닝을 받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으나 상사는 말머리를 슬그마니 돌렸다. 이쯤되어 낚였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트레이닝 기회는 좀더 그 툴을 테크니컬하게 다룰 다른 동료들에게로 가버렸고 나는 점점 더, 그냥 단순한 프로젝트 아웃룩 일정들만 포워딩하거나 기타 그런 일들만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다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기시작했다.


팀원들도 아주 여러명인데, 특히 비즈니스쪽에서 온 팀원들은 나는 프로젝트매니저의 비서쯤으로 여겼다. 내가 뭔가를 도입하려하거나 다른 시도를 하려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마치 내가 원래 내가 해야하는 그런 그들의 "시다바리"가 되는 일을 안하고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으며 점점 더 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그래도 첫 프로젝트의 타겟 국가인 나라로 도합 2번이나 팀원들과 함께 출장도 다녀왔다.
국제적인 팀, 출장, 다 이뤄냈다.
내 초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점은 여전히 마음에 크게 남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내가 만나본 역대 직속상관 중에서 지금의 상사는 쿨한 사람이고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프로페셔널 레벨로 반해있다. 그는 내가 벌써 지금까지 여러번 드러낸 불안감, 하고싶지 않은 일들만 계속 하게되고 내가 생각보다 예산관리도 이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대해서도 인정해주고 나를 똑똑한 사람인것처럼 말해주고 달래주었다. 그점은 지금도 잊지못하고 그래서 지금도 퇴사를 결심하겠다고 하고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프로젝트팀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겟 국가들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작고 초라해졌으며 뒤안방으로 물러나 정말 팀원들의 어드민적 일만 어레인지해주는 수준이 되어버렸고 그사이 맡게된 부서내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징이라고 내가 고집스럽게 쓰지만 사실은 팀내 총무자리가 공석이라 총무가 해야했을 프로젝트 비용 보고에 관련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며 점점 더 마음적으로는
이 프로젝트 팀에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더 이 프로젝트 포르톨리오 매니징이라 이름붙인 업무에 "영끌"이라는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나 녹여가며 이사람 저사람 컨텍해가며 쪼으고, 문의하고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단순 오퍼레이션이 아닌 그 한단계 윗 레벨로라도 올려서 체계를 잡아가려고 분투중이었다.

 




새해는 이제 갓 시작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부서에서 일했던 것과 꼭 같은
1년 9개월째를 살아내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짧막한 이력들로 도배가 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내 이력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얼굴에 면을 세울 수 있는 최소 2년을 채우게되는 4월 말까지 100일의 시간을 줘보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4월은 의미가 깊은 달이다.
이 회사에서 매년 4월달에는 전년도 업무평가와 회사의 한해 수익률 달성정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달이다. 만일 정말 4월까지 해서 징글징글한 "최소 2년"을 채우고나서 CIO가 떠난다는 그 5월에 나도 퇴사통보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보너스는 챙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오늘 나는, 상사와 업무 관련하여 전화통화가 한 번 있었고 우리의 대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그와 이야기할때면 늘 긴장한다.
헌데 너무 괜찮은 대화였다. 내가 악착같이 집착하는 그놈의 그 기획, 그놈의 얼어죽을 컨셉만들기... 오늘 내가 만들고 있는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컨셉 그래픽 시안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또 희망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희망일까? 올바른 희망일까?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있는걸까?
올해는 그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는 불안할까?
업무 외적인 것들을 놓고 봤을 때, 구체적으로 직장생활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자주 괴롭게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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