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래!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은 내가 이 회사에서 원하는대로 해 보고 나간다!"


오기에 받쳐있었던 때였다.


1. 조직내에 인터내셔널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들도 분명 있다. 
한번은 기필코 그런 팀에서 다녀볼거다. 그래야 이게 명색이 글로벌한 기업이지. 어디 죄다 팀에 걸려도 순 그런데만 골라서 걸렸나 몰라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는거냐 싶었다.
2.  내친김에 여기서 다른 나라로 출장도 한 번은 가보고 싶다.
3. 프로젝트매니지먼트쪽이 수요도 많고 프로젝트 체인지매니지먼트 하면서 어깨넘어로 익힌게 있으니, 좀더 시작은 프로젝트코디네이팅 정도지만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에 차라리 밀착해서 가까이서 숨가쁘게 일하면 적어도 이력은 더 붙을거야.
그래서 이력서에 그런 관련 직책, 직무, 한줄이라도 남기고야 말겠다!

 

그당시 나는 반.드.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거실 벽에 A4용지를 여러장 이어서 거의 전지만한 크기의 백지를 만든 뒤 구호를 적어 붙였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것이다!!!!
나는 해 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똘기라도 없었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현재 포지션을 사내 커리어마켓 웹사이트에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같은 IT부서인데 각종 재무회계 비즈니스프로세스를 디지털적으로 구현시키는 일을 맡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구매관리를 위한 새로운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와 긴밀히 일하며 로젝트 코디네이션을 하고 일정관리, 프로젝트 스케쥴 관리, 예산관리, 컨설팅회사 등 외주 직원들의 비용 인보이스 관리 등을 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그 ERP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정말 직업시장에서 금싸라기라고 불릴 IT 프로젝트매니지먼트 분야 그리고 ERP 분야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며 이전의 그 어떤 포지션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이력서를 업그레이드 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서의 어시스턴트에게 그 포지션에 대한 정보를 문의했고 그는 바로 현재의 상사가 된 그당시 그 부서장으로 갓 부임해온 그에게 나를 연결시켜주었다. 우리는 전화통화로 처음 만났으며 전화통화 뒤 그는 이력서를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우리는 대면 면접으로 다시 만났다.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현지인이 아닌, 나처럼 외국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앞으로 자신의 팀원을 최대한 다국적으로 채용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상사인 자신이 죄다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조직을 잘 통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번 목격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출신으로 대기업의 한 부서에 간부의 자리로 스카웃되어 온 사람이고 그 말인즉 그는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느낀바가 한 가지 있는데, 현지인 직원들은 다들 엇비슷하게 평균적이라면 타국 출신의 직원들은 동일직급내, 동일 연령대 현지인들과 비교해서 아주 스마트하고 목표지향적이며 이미 본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재 퍼포먼스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루즈하고 자기 몫만 챙기고 깰짝거리듯 일하고 뻑하면 아프다고 병가내고 또 너무 일을 열심히 많이 잘하기라도 하면 시기질투나 하는, 자기가 나고자란 고향 근처 도시에서 대학나오고 또 그 대학나온데 근처 도시인 이 회사에 자리하나 얻어서 마치 정년퇴직 할때까지 다닐 기세로 사는 사람들과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 다수의 팔자좋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기세좋은 말빨로 자신의 무능함을 자기합리화하며 유능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질투와 견제가 굉장히 심했다. 거기다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경직되고 낡아있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대체로 평탄한 인생을 누리며 살아온, 소위말하는 선진국이라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민족들이었다.


또한 상사는 새로 부임해와서 그당시 자신의 담당 부서 내 많은 공석들을 계속 채용해야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말인즉,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직원들, 즉 아주 프레쉬하게 외부의 지원자들을 뽑아서 이 부서를 채워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엄청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적중했다. 그는 발군의 실력으로 아주 유능한 인재들로 팀을 채워나갔고 그가 불러모은 팀원들은 과연 똑똑하고 여유롭고 자상하기까지한 배울 점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뽑아 꾸린 팀은 나날이 성장하는 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초기에 얘기했던 "단순히 프로젝트 어시스턴트 적인 프로젝트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정말 프로젝트매니저와 파트너처럼 일하는" 그런 식의 그림에서부터 애석하게도 점점 멀어져갔다.


 

왜 매번 이렇게 될까?

이렇게 되고 마는데는 전부 다 내탓인걸까? 막상 쥐뿔도 없는애여서? 그래놓고 원하는 건 저 높은데 있는 욕심만 앞서고 실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걸까? 나는 스스로의 인지능력 및 지적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굉장히 초라하고 풀죽고 불안하게 어긋나가게 되었다.


초반에 약속했던 그 ERP시스템의 트레이닝도 내 몫은 없어졌다. 이전에는 나도 트레이닝을 받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으나 상사는 말머리를 슬그마니 돌렸다. 이쯤되어 낚였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트레이닝 기회는 좀더 그 툴을 테크니컬하게 다룰 다른 동료들에게로 가버렸고 나는 점점 더, 그냥 단순한 프로젝트 아웃룩 일정들만 포워딩하거나 기타 그런 일들만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다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기시작했다.


팀원들도 아주 여러명인데, 특히 비즈니스쪽에서 온 팀원들은 나는 프로젝트매니저의 비서쯤으로 여겼다. 내가 뭔가를 도입하려하거나 다른 시도를 하려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마치 내가 원래 내가 해야하는 그런 그들의 "시다바리"가 되는 일을 안하고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으며 점점 더 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그래도 첫 프로젝트의 타겟 국가인 나라로 도합 2번이나 팀원들과 함께 출장도 다녀왔다.
국제적인 팀, 출장, 다 이뤄냈다.
내 초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점은 여전히 마음에 크게 남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내가 만나본 역대 직속상관 중에서 지금의 상사는 쿨한 사람이고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프로페셔널 레벨로 반해있다. 그는 내가 벌써 지금까지 여러번 드러낸 불안감, 하고싶지 않은 일들만 계속 하게되고 내가 생각보다 예산관리도 이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대해서도 인정해주고 나를 똑똑한 사람인것처럼 말해주고 달래주었다. 그점은 지금도 잊지못하고 그래서 지금도 퇴사를 결심하겠다고 하고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프로젝트팀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겟 국가들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작고 초라해졌으며 뒤안방으로 물러나 정말 팀원들의 어드민적 일만 어레인지해주는 수준이 되어버렸고 그사이 맡게된 부서내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징이라고 내가 고집스럽게 쓰지만 사실은 팀내 총무자리가 공석이라 총무가 해야했을 프로젝트 비용 보고에 관련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며 점점 더 마음적으로는
이 프로젝트 팀에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더 이 프로젝트 포르톨리오 매니징이라 이름붙인 업무에 "영끌"이라는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나 녹여가며 이사람 저사람 컨텍해가며 쪼으고, 문의하고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단순 오퍼레이션이 아닌 그 한단계 윗 레벨로라도 올려서 체계를 잡아가려고 분투중이었다.

 




새해는 이제 갓 시작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부서에서 일했던 것과 꼭 같은
1년 9개월째를 살아내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짧막한 이력들로 도배가 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내 이력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얼굴에 면을 세울 수 있는 최소 2년을 채우게되는 4월 말까지 100일의 시간을 줘보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4월은 의미가 깊은 달이다.
이 회사에서 매년 4월달에는 전년도 업무평가와 회사의 한해 수익률 달성정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달이다. 만일 정말 4월까지 해서 징글징글한 "최소 2년"을 채우고나서 CIO가 떠난다는 그 5월에 나도 퇴사통보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보너스는 챙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오늘 나는, 상사와 업무 관련하여 전화통화가 한 번 있었고 우리의 대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그와 이야기할때면 늘 긴장한다.
헌데 너무 괜찮은 대화였다. 내가 악착같이 집착하는 그놈의 그 기획, 그놈의 얼어죽을 컨셉만들기... 오늘 내가 만들고 있는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컨셉 그래픽 시안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또 희망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희망일까? 올바른 희망일까?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있는걸까?
올해는 그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는 불안할까?
업무 외적인 것들을 놓고 봤을 때, 구체적으로 직장생활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자주 괴롭게 하는걸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러다 팀 내 한 직원이 자신이 아는 다른 부서의 직원이 IT부서에 있는데 프로젝트를 여러나라에 걸쳐 롤아웃하여 새로운 서비스 체제를 도입하는데 변화관리매니저로 커뮤니케이션, 트레이닝 그리고 프로젝트 마케팅적인 업무들을 담당할 사람으로 조직 내 채용에도 관심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그것을 그 당시 부장에게 추천 한 줄 몰랐으나, 나중에 그녀가 직접 말해주어 알게 된 것이었다. 고마웠다.

나는 그 부서에 지원을 하였고 거의 형식적인것에 불과한 면접을 거쳐 그 부서에 들어가게되었고 그렇게 하여 나는 비록 업무의 내용은 큰 성격적 차이가 없지만 조직도 상에서는 HR에서 IT로, 내 이력서 내에서도 보면 HR 혹은 총무 적인 일들을 하던 것에서 IT 로의 업종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부서에서는 1년 반 + 3개월 노티스기간 도합 1년 9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현재 부서로 이번에는 내가 자진해서 직접 찾아서 옮긴 지금의 포지션으로 오기전까지 있으며 글로벌 프로젝트가 숨가쁘게 흘러가는 동안 열성적으로 HRD 그 부서에서 조금씩 알게된 이러닝 프로그램 짜고 사내 이러닝 페이지에 외주 러닝업체에서 받은 프로그램 업로드를 하여 유저들에게 론칭도 했고 수많은 뉴스레터들을 작성했고 커뮤니케이션 컨셉을 짜서 발표했으나 그 프로젝트가 끝나며 다른 프로젝트들도 별로 그런 규모의 체인지 매니지먼트가 요구되는 일이 없는 상태였고 일감을 주기위해 억지로 일을 만들어내는데 그 일들이란 다시금 그런 환경미화같은, 상사의 프레젠테이션 꾸며주는 것, 부서장이 매월 1회 하는 커뮤니케이션 할때 파워포인트 예쁘게 만들어주는 것, 어느 서비스팀 판촉물로 티셔츠가 필요한데 그 티셔츠 주문해주는 일을 하며 다시 내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일로 회귀어버리고 마는 기현상을 목격하게되었다. 이런 반복적 경험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된다.

 그무렵 당시 HRD 그 팀에서 대학원생 신분으로 업무보조일을 해주던 남자가 석사학위를 따고나서 정규직으로 또다시 이 회사에 지원을 했고 나랑 똑같은 포지션으로 해서 그 IT 부서의 팀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는 내가 그를 가르쳐주는 입장이었는데 점점 더 그는 자기도 막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액션들을 취했고 그는 현지인이었다. 그 제법 체인지매니저 다운 체인지매니지먼트를 그나마 해볼 수 있었던 프로젝트가 끝나고나가 부서에서는 자기들도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켜줘야 할 지 모르는 눈치였고, (그 더 자세한 내막은 아직은 써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다. 다시 그때 내가 느꼈던 암담함이 떠올라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밖에는 당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울며겨자먹기로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런데 정말이지 다른 직원들과 활달하게 어울리며 정보를 얻고 그것으로 다음 업무 (즉, 어느어느 서비스팀 무슨 로고 디자인이 필요한거 그거 내가 이번에 해줄게, 이런식. 혹인 아 그런 뉴스레터 쓸게 있어? 그럼 그거 이번에 우리에게 가져와 우리가 해줄게. 그런식..)  수주받는(?) 수준으로 일이 돌아가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그따위 일을 하고싶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나는 영주권이 없는 상태로는 직장을 반드시 다녀야만 체류증이 연장되었기에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못견뎌하는 것들.

 

1. 불명확함.
포지션이 명확하지 않고, 포지션을 채용 할 시 장기적 관점에서 그 직렬을 어떻게 개발할 지 계획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러한 조직.
2. 이상한 조직구성.
직속상사는 있는데 그 상사는 직접적으로 업무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 밑에 있는 좀더 나이 많으면서 나랑 같은 업무를 하는 여자가 또 다른 상사같은 그런 역할, 게다가 안그래도 장기적 관점도 없는주제에 덜컥 똑같은 일 맡을 사람을 한명 더 뽑아놓고 작은 파이로 등분해서 나눠먹기식으로 일을 나누려고 하는 그런 것들에서 느껴지는 무능력함.

 

3. 이상이 심각하게 좌절되는 현실
결국 그러면 내가 잘하는 뭐 만들어주고 작문해주고 프레젠테이션 만들어주는 내가 언제나 능력을 인정받아왔던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의 일을 결국 남의 일 돋보이게 예쁘게 해주는 정도로 전락하는 일로만 구현이 되는 상태를 직면한다는 것. (나에게 크리에이티브한 행위는 숭고한 영역이어야하는데, "어씨"적인 일로밖에는 풀어낼수가 없는것이다)
4.뫼비우스의 띠: 싫은 업무로의 회귀
결국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뒤치닥거리, 어씨적인 그런 업무들만이 주어지면서 내가 주도적으로 컨텐츠를 짜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그 컨텐츠를 주는 사람들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것. 이번에도 역시 그런 일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것. 되려 자꾸만 자꾸만 그런 일로 돌아오고있는 것. 나는 그런 일만 계속 해야되는 사람인데 나만이 나를 착각하고 있는건가? 이때 사실 나는 스스로 인지왜곡이나 어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를 두고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5. 단일민족성이 강한 곳. 
나름대로 글로벌한 편에 속하는 본사이지만 그 부서는 유독, 특히 내가 속한 직속팀은 유독 현지인들만 있는 곳이었고, 나는 한국에서 단일민족성이 강한 곳에서 나고자라는 와중에도 그게 참 갑갑하고 불편했는데 여기서조차 그것을 느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6. 7. 8. 9. 10.....해서 번호를 계속 붙여나갈 수도 있지만 그럴수 없다. 그러자면 기억을 너무 많이 끄집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곳에서도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리 잡코칭을 받아보고 마음을 돌려보려고해도 저항감만이 더 커져서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 자체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을 버리듯 떠난것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인수인계도 매뉴얼도 철저히 남겨주고 마지막까지 굴욕감 다 참아내며 그들의 눈총도 바보스러울정도로 납작 기어가며 맞춰주고 받아주었고 아주 도피한 것은 아니지만서도,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그들을 버렸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가 아니라, 나의 미래, 내가 꿈꾸고싶은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줄곧 그래왔던 것 같다. 

나는 버리듯이 절단하고 끊고 나오는 식으로 떠나버렸다.

더러는 정말로 다 끊고 추하게 끝난적도 있었고 대개는 표면적으로는 신사적인 체 해놓고서 다시는 찾지않는 식으로 끝냈다. 그로인해 그들을 떠나온데에 대해서는 추호의 후회도 없지만 계속해서 악업을 쌓고 있는 것 같다는 죄책감 "모 아니면 도"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 완벽주의적 성향, 시궁창같은 현실에 비해 높다란 이상에서 오는 괴리를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에서 비롯된 수치심..  죄책감과 수치심의 종착점은 늘 분노였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지금의 부서에서 열린 포지션 공고를 내가 직접 찾아서 내가 직접 다 처리한 뒤 통보를 했을 때 그들이 내가 얼마나 미웠을지는 지금 생각해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그 행동들, 그 선택들로 인해 얻은것과 잃은것, 명암의 대비가 분명한 환경 속으로 나 자신을 한층 더 깊숙이 던져넣어버리고 말았다.

이 조직에서 9개월짜리 한시직으로 들어와서 바람앞의 등불같던 시간들을 지나오며, 생각보다 잡초같이 질긴 생명력으로, 생각보다 많은 기회를 어찌어찌해서 얻어가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쟁취해 내었지만 그에따른 과보도 컸고, 또한 자꾸만 거듭할수록 이런 말단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내 스스로의 팔자를 꼬으고 있는 것 같은 스스로에대한 짜증, 좌절, 불만족, 불안, 그리고 앞서 이미 말했듯이 성격상의 치명적 단점이 장기적으로 발현되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받으며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많이 자체적으로 검열 편집해서 나열한 분량과 내용임에도 그때당시의 그 암담함, 스스로에대한 실망, 내가 내린 결정들에 뒤따르는 과보,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런 식으로밖에는 처리가 안되는 나자신에 대한 자살충동에 버금가는 자기 파괴욕구 등등의 진절머리나는 감정들이 여과없이 다시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죽어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옵션은 없었다. 나는 무조건 어떤 창의적인 머리를 굴려서라도 살아남아야했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짧막한 부서별 업무경험이 반복되어서는 더욱 더 망해가면 망했지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下편에서 계속)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어제 오후에 회사 대표가 전직원에게 보내는 뉴스레터 공문 이메일이 한 통 들어왔다.

또 무슨 소식을 나누시려고 그러나 하고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다름아닌 회사의 CIO가 5월 31일자로 퇴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의에 의해 떠나는 것이며 다른 산업군의 다른 기업의 직책을 맡아서 간다는 내용만이 나와있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직접 그 CIO가 짧막한 영상메시지를 만들어서 또 전직원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비록 어제 발표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상 속 그는 차분한 표정이었으며, 이 나라는 퇴사를 하게되거나 당하게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상호간에 3개월의 노티스 기간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는 5월 말까지 인수인계를 하고 여러가지 신변정리를 하는 기간으로 삼을 것이다. 아직 후임은 구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각 영역별로 소위 말하는 C자 들어가는 (CEO, CIO, COO, CHRO 등등) 경영진 중에서 IT 담당 답게, 그러나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열정적이고 유능한 멤버였던 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오래 남을 줄 알았으며,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가 길어지고 있는 시국에 회사 내 IT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하게 급부상하고 있는 시점에 그 수장인 사람이 사임을 한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바로 그때문에 그는 더욱 더 자신의 유능한 날개를 펼치기 위하여 그의 능력을 원하는 곳으로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조직에 CIO로 영입되어 와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그간 이 조직에 많은 디지털 변혁 관련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고 성과를 달성해왔다. 사내 밴드의 드러머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안경테 색깔을 그때 그때 전달하는 메시지의 특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매치하여 사진이나 영상자료에 등장하곤 하는, 그 나이대 대기업 중역으로서는 상당히 재치있는 센스를 가진 사람이었다.

문득 나는 내 이민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조직에서 보낸 기간을 정산해보았다.

첫 2년은 다른 도시의 두 개의 다른 직장을 거쳤으며, 그리고 이 곳에서의 첫 부서에서 비록 9개월짜리 계약직 자리이긴 하지만 더이상 한국 교민사회 혹은 주재원사회로 불리우는 한국계 기업 해외지사 생활을 벗어나서 현지기업 근무경력을 쌓고 현지의 직업시장에 당당하게 한 자리 비집고 들어가 보려는 그당시 나름 투철한 의지로 선택한 그 첫 단추를 끼우면서 이 곳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벌써 4년이 넘는 시간 전의 일이었다.


4년 하고도 2개월. 오래도 있었다.


그리고 첫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을 느꼈다.

 


 

첫 부서는 9개월짜리 계약직이었고, HR 부서 중에서도 인재개발을 담당하는 인사 개발 및 인재관리(Development & Talent Management)를 하는 이었고 그곳에서 9개월 간 해외지사로 파견근무를 간 직원을 한시적으로 메꾸는 자리였으나 당시 HR은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던 때여서 9개월 뒤 운이 좋으면 같은 포지션이나 혹은 다른 포지션으로 해서 계약이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지만 그런 리스크를 다 감안하고 상호간의 동의하에 들어가게 된 곳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도시에서 다니고 있던 한국계 기업 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초짜배기 이민자이자 사회초년생이었고, 생각했던 것 보다도 너무 내가 한국에서 싫었던 부분들을 그 회사를 다니면서 한국을 벗어난 이곳에서 조차 보게되는 부분들에서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할 때였다. 그리고 어떤 기회든 나를 조금 더 큰 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맨땅에 헤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돌격 앞으로 할 수 있을 똘기어린 패기...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직도 20대 중반이었고 이민도 초기 정착단계였고 가진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그럴 때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감행 할 여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어라, 그래도 나 받아들여졌네? 그래 이제부터는 이렇게 좁다란 교민사회를 벗어나서 기왕 깨지고 기왕 망해도 현지사회에 한결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물에서 놀자 라는 마음. 그리고 큰 기업의 본사, 그것도 HR. 나는 계약직이지만 인턴사원도 아닌 그냥 평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로 뭔가 좀 되는 사람이라는 자뻑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자뻑으로 인하여 엄청난 메가톤급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와 앞통수를 차례로 가격당하며 고꾸라지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했던 것, 상상했던 것, 기대했던 것과 달랐고 그 당시 팀원들은 아무리 HR이라지만 정말로 여초였으며 다른 이웃 HR팀들에 비해서도 다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드세고 남의 말 하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gossiper 들이었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생판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하나 계약직을 달았지만 자기네 조직에 들어와서는 자기들 여왕벌들에게 사바사바도 안하고 외따로이 구는 듯해 보이는 모양새를 보고 견제에 들어갔던 것 같다.

솔직해지겠다. 나는 그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더 큰 실망은, 내가 왜 붙었는지가 이해되면서 들기 시작한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던 것이다. 값싸고 멋모르는 이민온지 얼마 안된 여자애. 그리고 당시 맨땅에 헤딩도 불사를만큼 똘기와 패기로 무장한채 면접을 쌈싸먹는 신공을 발휘한 여자애.
젊고 의지력 강해보이고 뭔가 용기있어보이는 프런티어정신으로 똘똘 뭉쳐보이는 여자애에게 기회 한번 주면서 게다가 몸값도 그당시 기준으로 다른 중견 직원들에 비해 훨씬 쌌을 것이고 그래서 그냥 들어와서 이거저거 일 좀 시켜보면서, 그런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맹탕이네? 그래 그도 그럴것이 내가 이전까지 했던 일들은 이메일 포워딩하고 커스토머서비스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종 혹은 어시스턴트, 그 제일 마지막 한국계회사에서도 HR및 General Affair 부서 소속으로 한국인 CEO의 비서겸 주재원들 HR적 행정 처리 서포트겸 주로 사무용품 재고 담당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좀더 고차원적인 HR의 일을 담당해 본적은 없었다. 사실 그걸 원해서 그 9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을 계약직을 모든 리스크를 안고서 부여잡았던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 결국 나는 내가 잘나서 받아들여졌다기 보다는 얼굴마담으로 글로벌한 기업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 조직의 특성상 국적 구성 하나 더 추가하면서 싼값에 땜빵 돌려막기도 가능한, 잃을 것 하나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이 발현 되었다고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제는 정말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

기대와 실망, 그리고 실망을 하면 모든 희망을 다 잃고 행동이 엄청나게 위축되고 엄청나게 우울해지며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해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수긍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되바라지게 들이받지도 못하고 싫은 마음만 나날이 나날이 커져가고 그러다 급기야는 타인도 그것을 느끼게 되고, 타인들은 내가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나를 적대시하게 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며 우울의 나락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즉,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을 하면, 아주 깊고 짙은 슬픔의 나락으로 빠진다는 것.

점점 나의 행동들과 나의 마음가짐, 나의 불안감, 모든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키기 시작했고 5월 무렵 하여 계약 만료를 3개월 남짓 남긴 시점에서 계약연장을 못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당시 이전직장에서 3년짜리 노동가능한 비자를 소지했으나 회사를 옮기며 9개월로 비자기간까지 단축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온 상태여서 재계약이 안된다는 것은 비자도 연장이 안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앞이 깜깜했다. 나도 이런 부서에서 아무리 더 좋은 포지션으로 연장을 해준다해도 줘도 안할 상태였는데, 그런데 나는 비자에 종속된 신분이었다. 그때부터 백방으로 여기저기 지원서들을 돌리고 회사 내에도 다른 부서 다른 팀들에 난 공석들에 마구 지원을 했으나 한군데에서도 답을 듣지 못했었다.

 

 

(中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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