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2.01.2021

 


 

마치, 헛된 희망 같다고 할까요?
.....
헛될수록 비싸고 달콤하지요.
그 찰나의 희망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답니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中 쿠도 히나의 대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9회 속 장면: 쿠도 히나는 마주한 박애신과 가배(커피)를 들며 "헛된 희망"에 대해 읊조린다.

 


 

헛된 희망.
헛됨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덧 없는 것? 현실성이 없는 것?

이 이민생활은 나에게 헛된 꿈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지속 가능한 현실일까?

희망을 가지는 것.
그리고 걸었던 희망을 잃는 것.
실망하는 것. 모든 희망을 잃고 금새 좌절하는 나라는 사람.
나는 무엇을 위한 무슨 희망을 걸어왔던 것일까?

 

오늘은 어제 있었던 상사와의 콜의 연장선상으로 매월 1회 포트폴리오 현황 보고하는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상사와, 그 상사 아래 하나의 팀을 맡고있는 팀장 한명, 그리고 자기 관할 주요 프로젝트가 많은 부서 내 프로젝트매니저 한명, 그리고 나.

올해 들어 처음 하는 보고미팅이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 한 가운데 내용은 별 무리 없이 진행 해 나갈 수 있었다. 어제까지 시안 준비해오던 포트폴리오 컨셉관련 슬라이드는 몇몇 개선점들 피드백도 받았다. 생각보다 내가 아직 아주 완벽하게 흠잡을데없이, 매끄럽게 진행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스스로가 노래노래 불렀던 컨셉 제안하는것도 본인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 보다 실재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좌절감을 빨리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종류의 업무도 사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는 업무가 있기는 한걸까?
이것은 순전히 나 자신때문인걸까? 아니면 조금 다른 셋팅, 조금 다른 식의 조직이었다면 충분히 차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 마음 깊은 곳에다 대고 나는 사실은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이 업무를, 이 조직 내에서 이 부서내에서 이런 세팅 속에서 열과 성을 다 바쳐서까지 스스로를 개선시켜내고 어떤 한 획을 긋고 싶기는 한거야? 아니면 이 일이라도 한 번 어떻게 발전시켜서, 기존의 하기싫은 다른 종류의 일을 할때 드는 우울감을 상쇄시켜보려고 개중에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 여기에 빨대라도 한 번 꽂아보려고 하는거야?
정말로 이쪽 계통으로, 이쪽 분야로 나가고 싶어? 네가 그동안 그렇게 집착해왔던 이민자로서 현지 직업시장에서 각광받을 수 있을 분야로 스스로의 적성을 애써 맞추면서 그렇게 억지로 단련하고 있는거 아니야?


내가 걸었던 희망들, 그래 컨셉잡는 일을 하면 내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다 좋아해줄거야, 나는 내 아이디어를 잘 전달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어, 나는 창의적이야, 나는 똑똑하고 야무져, 나는 철두철미한 일을 해 내는 사람.. 기타등등,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런것들은 쿠도 히나의 말처럼, 개화기 시절 허영의 상징이었다던 가배같이 그런 허황되고 과장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어보이지만 실속은 없을지도 모를, 그렇고 그런 헛된 희망들이었을까?

나는 이런 일들 (사람들 대하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일들) 하기싫어하고, 늘 그런 것들에 불안감과 부담감을 느끼니까- 그에비해 천만다행으로 혼자서 생각해서 아이디어 짜내는 일, 기존에 없거나 정립이 미흡한 상태인 프로세스들 한데 모아서 엮는 일들을 좋아하니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얻게되면 나는 날개를 단 것 같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렇게 나의 못하는 부분들을 늘 요구받아야했던 업무들만을 대체로 해오던 나의 상처입고 억눌린 내적 자존심의 회복을 꾀하기 위해 나는 그런 희망들을 부풀려 생각해왔던 것일까?

애초부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목적의식에 입각한 희망, 전망, 기대가 아니었기에 조그마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희망들은 부서진다. 되려 그렇게 부서진 희망이라는 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져내리고 나면 남는 내 빈곤한 마음, 상처입고 불안정하고 어떻든 어떻게 해서든 내 허영기를 채워줄 좀 더 고상하고 품격 높은 일을 해 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을까봐 벌벌 떠는 자의식만이 드러난다.

 

 

 

처음엔 쓴맛만 나던 것 어느 순간 시고 고소하고 달콤해지다가 점차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밤에 잠까지 설치게 만든다는 헛된 희망 같은 것.



 

나는 부여잡을 것이 필요했다.
붙들 것이 필요했단 말이다. 지금 현실이 이러하니, 그래도 주어진 것들 중에서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까 이런 정도 쥐고 있으면 나쁜 패는 아닐 거 같으니까. 기왕이면 그냥 '나쁜 패는 아닐거 같으니까'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패이기를 바라고 그 패로 어떻든 한 몫 잘 챙기면서 이 판에서 한 번 이겨보자는.. 이를테면 그런 심보 말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나에게 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일을 하고 싶기는 한 걸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그것을 하고싶어하는 걸까?



헛된 희망을 들이키려 하는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래!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은 내가 이 회사에서 원하는대로 해 보고 나간다!"


오기에 받쳐있었던 때였다.


1. 조직내에 인터내셔널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팀들도 분명 있다. 
한번은 기필코 그런 팀에서 다녀볼거다. 그래야 이게 명색이 글로벌한 기업이지. 어디 죄다 팀에 걸려도 순 그런데만 골라서 걸렸나 몰라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는거냐 싶었다.
2.  내친김에 여기서 다른 나라로 출장도 한 번은 가보고 싶다.
3. 프로젝트매니지먼트쪽이 수요도 많고 프로젝트 체인지매니지먼트 하면서 어깨넘어로 익힌게 있으니, 좀더 시작은 프로젝트코디네이팅 정도지만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에 차라리 밀착해서 가까이서 숨가쁘게 일하면 적어도 이력은 더 붙을거야.
그래서 이력서에 그런 관련 직책, 직무, 한줄이라도 남기고야 말겠다!

 

그당시 나는 반.드.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거실 벽에 A4용지를 여러장 이어서 거의 전지만한 크기의 백지를 만든 뒤 구호를 적어 붙였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것이다!!!!
나는 해 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똘기라도 없었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현재 포지션을 사내 커리어마켓 웹사이트에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같은 IT부서인데 각종 재무회계 비즈니스프로세스를 디지털적으로 구현시키는 일을 맡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구매관리를 위한 새로운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와 긴밀히 일하며 로젝트 코디네이션을 하고 일정관리, 프로젝트 스케쥴 관리, 예산관리, 컨설팅회사 등 외주 직원들의 비용 인보이스 관리 등을 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그 ERP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정말 직업시장에서 금싸라기라고 불릴 IT 프로젝트매니지먼트 분야 그리고 ERP 분야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며 이전의 그 어떤 포지션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이력서를 업그레이드 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서의 어시스턴트에게 그 포지션에 대한 정보를 문의했고 그는 바로 현재의 상사가 된 그당시 그 부서장으로 갓 부임해온 그에게 나를 연결시켜주었다. 우리는 전화통화로 처음 만났으며 전화통화 뒤 그는 이력서를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우리는 대면 면접으로 다시 만났다.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현지인이 아닌, 나처럼 외국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앞으로 자신의 팀원을 최대한 다국적으로 채용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상사인 자신이 죄다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조직을 잘 통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번 목격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출신으로 대기업의 한 부서에 간부의 자리로 스카웃되어 온 사람이고 그 말인즉 그는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느낀바가 한 가지 있는데, 현지인 직원들은 다들 엇비슷하게 평균적이라면 타국 출신의 직원들은 동일직급내, 동일 연령대 현지인들과 비교해서 아주 스마트하고 목표지향적이며 이미 본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재 퍼포먼스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루즈하고 자기 몫만 챙기고 깰짝거리듯 일하고 뻑하면 아프다고 병가내고 또 너무 일을 열심히 많이 잘하기라도 하면 시기질투나 하는, 자기가 나고자란 고향 근처 도시에서 대학나오고 또 그 대학나온데 근처 도시인 이 회사에 자리하나 얻어서 마치 정년퇴직 할때까지 다닐 기세로 사는 사람들과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들 다수의 팔자좋은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기세좋은 말빨로 자신의 무능함을 자기합리화하며 유능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질투와 견제가 굉장히 심했다. 거기다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경직되고 낡아있었다. 변화의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대체로 평탄한 인생을 누리며 살아온, 소위말하는 선진국이라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민족들이었다.


또한 상사는 새로 부임해와서 그당시 자신의 담당 부서 내 많은 공석들을 계속 채용해야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말인즉,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직원들, 즉 아주 프레쉬하게 외부의 지원자들을 뽑아서 이 부서를 채워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엄청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적중했다. 그는 발군의 실력으로 아주 유능한 인재들로 팀을 채워나갔고 그가 불러모은 팀원들은 과연 똑똑하고 여유롭고 자상하기까지한 배울 점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뽑아 꾸린 팀은 나날이 성장하는 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초기에 얘기했던 "단순히 프로젝트 어시스턴트 적인 프로젝트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정말 프로젝트매니저와 파트너처럼 일하는" 그런 식의 그림에서부터 애석하게도 점점 멀어져갔다.


 

왜 매번 이렇게 될까?

이렇게 되고 마는데는 전부 다 내탓인걸까? 막상 쥐뿔도 없는애여서? 그래놓고 원하는 건 저 높은데 있는 욕심만 앞서고 실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걸까? 나는 스스로의 인지능력 및 지적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행동이나 마음가짐은 굉장히 초라하고 풀죽고 불안하게 어긋나가게 되었다.


초반에 약속했던 그 ERP시스템의 트레이닝도 내 몫은 없어졌다. 이전에는 나도 트레이닝을 받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으나 상사는 말머리를 슬그마니 돌렸다. 이쯤되어 낚였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트레이닝 기회는 좀더 그 툴을 테크니컬하게 다룰 다른 동료들에게로 가버렸고 나는 점점 더, 그냥 단순한 프로젝트 아웃룩 일정들만 포워딩하거나 기타 그런 일들만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다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기시작했다.


팀원들도 아주 여러명인데, 특히 비즈니스쪽에서 온 팀원들은 나는 프로젝트매니저의 비서쯤으로 여겼다. 내가 뭔가를 도입하려하거나 다른 시도를 하려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마치 내가 원래 내가 해야하는 그런 그들의 "시다바리"가 되는 일을 안하고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으며 점점 더 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그래도 첫 프로젝트의 타겟 국가인 나라로 도합 2번이나 팀원들과 함께 출장도 다녀왔다.
국제적인 팀, 출장, 다 이뤄냈다.
내 초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점은 여전히 마음에 크게 남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내가 만나본 역대 직속상관 중에서 지금의 상사는 쿨한 사람이고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프로페셔널 레벨로 반해있다. 그는 내가 벌써 지금까지 여러번 드러낸 불안감, 하고싶지 않은 일들만 계속 하게되고 내가 생각보다 예산관리도 이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대해서도 인정해주고 나를 똑똑한 사람인것처럼 말해주고 달래주었다. 그점은 지금도 잊지못하고 그래서 지금도 퇴사를 결심하겠다고 하고있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프로젝트팀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겟 국가들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작고 초라해졌으며 뒤안방으로 물러나 정말 팀원들의 어드민적 일만 어레인지해주는 수준이 되어버렸고 그사이 맡게된 부서내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징이라고 내가 고집스럽게 쓰지만 사실은 팀내 총무자리가 공석이라 총무가 해야했을 프로젝트 비용 보고에 관련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며 점점 더 마음적으로는
이 프로젝트 팀에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더 이 프로젝트 포르톨리오 매니징이라 이름붙인 업무에 "영끌"이라는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나 녹여가며 이사람 저사람 컨텍해가며 쪼으고, 문의하고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단순 오퍼레이션이 아닌 그 한단계 윗 레벨로라도 올려서 체계를 잡아가려고 분투중이었다.

 




새해는 이제 갓 시작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부서에서 일했던 것과 꼭 같은
1년 9개월째를 살아내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짧막한 이력들로 도배가 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내 이력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얼굴에 면을 세울 수 있는 최소 2년을 채우게되는 4월 말까지 100일의 시간을 줘보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4월은 의미가 깊은 달이다.
이 회사에서 매년 4월달에는 전년도 업무평가와 회사의 한해 수익률 달성정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달이다. 만일 정말 4월까지 해서 징글징글한 "최소 2년"을 채우고나서 CIO가 떠난다는 그 5월에 나도 퇴사통보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보너스는 챙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오늘 나는, 상사와 업무 관련하여 전화통화가 한 번 있었고 우리의 대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그와 이야기할때면 늘 긴장한다.
헌데 너무 괜찮은 대화였다. 내가 악착같이 집착하는 그놈의 그 기획, 그놈의 얼어죽을 컨셉만들기... 오늘 내가 만들고 있는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컨셉 그래픽 시안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또 희망을 갖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희망일까? 올바른 희망일까?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있는걸까?
올해는 그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는 불안할까?
업무 외적인 것들을 놓고 봤을 때, 구체적으로 직장생활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자주 괴롭게 하는걸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그러다 팀 내 한 직원이 자신이 아는 다른 부서의 직원이 IT부서에 있는데 프로젝트를 여러나라에 걸쳐 롤아웃하여 새로운 서비스 체제를 도입하는데 변화관리매니저로 커뮤니케이션, 트레이닝 그리고 프로젝트 마케팅적인 업무들을 담당할 사람으로 조직 내 채용에도 관심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그것을 그 당시 부장에게 추천 한 줄 몰랐으나, 나중에 그녀가 직접 말해주어 알게 된 것이었다. 고마웠다.

나는 그 부서에 지원을 하였고 거의 형식적인것에 불과한 면접을 거쳐 그 부서에 들어가게되었고 그렇게 하여 나는 비록 업무의 내용은 큰 성격적 차이가 없지만 조직도 상에서는 HR에서 IT로, 내 이력서 내에서도 보면 HR 혹은 총무 적인 일들을 하던 것에서 IT 로의 업종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부서에서는 1년 반 + 3개월 노티스기간 도합 1년 9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현재 부서로 이번에는 내가 자진해서 직접 찾아서 옮긴 지금의 포지션으로 오기전까지 있으며 글로벌 프로젝트가 숨가쁘게 흘러가는 동안 열성적으로 HRD 그 부서에서 조금씩 알게된 이러닝 프로그램 짜고 사내 이러닝 페이지에 외주 러닝업체에서 받은 프로그램 업로드를 하여 유저들에게 론칭도 했고 수많은 뉴스레터들을 작성했고 커뮤니케이션 컨셉을 짜서 발표했으나 그 프로젝트가 끝나며 다른 프로젝트들도 별로 그런 규모의 체인지 매니지먼트가 요구되는 일이 없는 상태였고 일감을 주기위해 억지로 일을 만들어내는데 그 일들이란 다시금 그런 환경미화같은, 상사의 프레젠테이션 꾸며주는 것, 부서장이 매월 1회 하는 커뮤니케이션 할때 파워포인트 예쁘게 만들어주는 것, 어느 서비스팀 판촉물로 티셔츠가 필요한데 그 티셔츠 주문해주는 일을 하며 다시 내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일로 회귀어버리고 마는 기현상을 목격하게되었다. 이런 반복적 경험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된다.

 그무렵 당시 HRD 그 팀에서 대학원생 신분으로 업무보조일을 해주던 남자가 석사학위를 따고나서 정규직으로 또다시 이 회사에 지원을 했고 나랑 똑같은 포지션으로 해서 그 IT 부서의 팀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는 내가 그를 가르쳐주는 입장이었는데 점점 더 그는 자기도 막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액션들을 취했고 그는 현지인이었다. 그 제법 체인지매니저 다운 체인지매니지먼트를 그나마 해볼 수 있었던 프로젝트가 끝나고나가 부서에서는 자기들도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켜줘야 할 지 모르는 눈치였고, (그 더 자세한 내막은 아직은 써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다. 다시 그때 내가 느꼈던 암담함이 떠올라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밖에는 당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울며겨자먹기로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런데 정말이지 다른 직원들과 활달하게 어울리며 정보를 얻고 그것으로 다음 업무 (즉, 어느어느 서비스팀 무슨 로고 디자인이 필요한거 그거 내가 이번에 해줄게, 이런식. 혹인 아 그런 뉴스레터 쓸게 있어? 그럼 그거 이번에 우리에게 가져와 우리가 해줄게. 그런식..)  수주받는(?) 수준으로 일이 돌아가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그따위 일을 하고싶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나는 영주권이 없는 상태로는 직장을 반드시 다녀야만 체류증이 연장되었기에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못견뎌하는 것들.

 

1. 불명확함.
포지션이 명확하지 않고, 포지션을 채용 할 시 장기적 관점에서 그 직렬을 어떻게 개발할 지 계획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러한 조직.
2. 이상한 조직구성.
직속상사는 있는데 그 상사는 직접적으로 업무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 밑에 있는 좀더 나이 많으면서 나랑 같은 업무를 하는 여자가 또 다른 상사같은 그런 역할, 게다가 안그래도 장기적 관점도 없는주제에 덜컥 똑같은 일 맡을 사람을 한명 더 뽑아놓고 작은 파이로 등분해서 나눠먹기식으로 일을 나누려고 하는 그런 것들에서 느껴지는 무능력함.

 

3. 이상이 심각하게 좌절되는 현실
결국 그러면 내가 잘하는 뭐 만들어주고 작문해주고 프레젠테이션 만들어주는 내가 언제나 능력을 인정받아왔던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의 일을 결국 남의 일 돋보이게 예쁘게 해주는 정도로 전락하는 일로만 구현이 되는 상태를 직면한다는 것. (나에게 크리에이티브한 행위는 숭고한 영역이어야하는데, "어씨"적인 일로밖에는 풀어낼수가 없는것이다)
4.뫼비우스의 띠: 싫은 업무로의 회귀
결국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뒤치닥거리, 어씨적인 그런 업무들만이 주어지면서 내가 주도적으로 컨텐츠를 짜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그 컨텐츠를 주는 사람들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것. 이번에도 역시 그런 일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것. 되려 자꾸만 자꾸만 그런 일로 돌아오고있는 것. 나는 그런 일만 계속 해야되는 사람인데 나만이 나를 착각하고 있는건가? 이때 사실 나는 스스로 인지왜곡이나 어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를 두고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5. 단일민족성이 강한 곳. 
나름대로 글로벌한 편에 속하는 본사이지만 그 부서는 유독, 특히 내가 속한 직속팀은 유독 현지인들만 있는 곳이었고, 나는 한국에서 단일민족성이 강한 곳에서 나고자라는 와중에도 그게 참 갑갑하고 불편했는데 여기서조차 그것을 느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6. 7. 8. 9. 10.....해서 번호를 계속 붙여나갈 수도 있지만 그럴수 없다. 그러자면 기억을 너무 많이 끄집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여 그곳에서도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리 잡코칭을 받아보고 마음을 돌려보려고해도 저항감만이 더 커져서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 자체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을 버리듯 떠난것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인수인계도 매뉴얼도 철저히 남겨주고 마지막까지 굴욕감 다 참아내며 그들의 눈총도 바보스러울정도로 납작 기어가며 맞춰주고 받아주었고 아주 도피한 것은 아니지만서도,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그들을 버렸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가 아니라, 나의 미래, 내가 꿈꾸고싶은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줄곧 그래왔던 것 같다. 

나는 버리듯이 절단하고 끊고 나오는 식으로 떠나버렸다.

더러는 정말로 다 끊고 추하게 끝난적도 있었고 대개는 표면적으로는 신사적인 체 해놓고서 다시는 찾지않는 식으로 끝냈다. 그로인해 그들을 떠나온데에 대해서는 추호의 후회도 없지만 계속해서 악업을 쌓고 있는 것 같다는 죄책감 "모 아니면 도"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 완벽주의적 성향, 시궁창같은 현실에 비해 높다란 이상에서 오는 괴리를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에서 비롯된 수치심..  죄책감과 수치심의 종착점은 늘 분노였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지금의 부서에서 열린 포지션 공고를 내가 직접 찾아서 내가 직접 다 처리한 뒤 통보를 했을 때 그들이 내가 얼마나 미웠을지는 지금 생각해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그 행동들, 그 선택들로 인해 얻은것과 잃은것, 명암의 대비가 분명한 환경 속으로 나 자신을 한층 더 깊숙이 던져넣어버리고 말았다.

이 조직에서 9개월짜리 한시직으로 들어와서 바람앞의 등불같던 시간들을 지나오며, 생각보다 잡초같이 질긴 생명력으로, 생각보다 많은 기회를 어찌어찌해서 얻어가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쟁취해 내었지만 그에따른 과보도 컸고, 또한 자꾸만 거듭할수록 이런 말단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내 스스로의 팔자를 꼬으고 있는 것 같은 스스로에대한 짜증, 좌절, 불만족, 불안, 그리고 앞서 이미 말했듯이 성격상의 치명적 단점이 장기적으로 발현되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받으며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많이 자체적으로 검열 편집해서 나열한 분량과 내용임에도 그때당시의 그 암담함, 스스로에대한 실망, 내가 내린 결정들에 뒤따르는 과보,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런 식으로밖에는 처리가 안되는 나자신에 대한 자살충동에 버금가는 자기 파괴욕구 등등의 진절머리나는 감정들이 여과없이 다시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죽어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옵션은 없었다. 나는 무조건 어떤 창의적인 머리를 굴려서라도 살아남아야했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짧막한 부서별 업무경험이 반복되어서는 더욱 더 망해가면 망했지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下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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