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어제 오후에 회사 대표가 전직원에게 보내는 뉴스레터 공문 이메일이 한 통 들어왔다.

또 무슨 소식을 나누시려고 그러나 하고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다름아닌 회사의 CIO가 5월 31일자로 퇴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의에 의해 떠나는 것이며 다른 산업군의 다른 기업의 직책을 맡아서 간다는 내용만이 나와있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직접 그 CIO가 짧막한 영상메시지를 만들어서 또 전직원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비록 어제 발표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상 속 그는 차분한 표정이었으며, 이 나라는 퇴사를 하게되거나 당하게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상호간에 3개월의 노티스 기간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는 5월 말까지 인수인계를 하고 여러가지 신변정리를 하는 기간으로 삼을 것이다. 아직 후임은 구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각 영역별로 소위 말하는 C자 들어가는 (CEO, CIO, COO, CHRO 등등) 경영진 중에서 IT 담당 답게, 그러나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열정적이고 유능한 멤버였던 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오래 남을 줄 알았으며,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가 길어지고 있는 시국에 회사 내 IT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하게 급부상하고 있는 시점에 그 수장인 사람이 사임을 한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바로 그때문에 그는 더욱 더 자신의 유능한 날개를 펼치기 위하여 그의 능력을 원하는 곳으로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조직에 CIO로 영입되어 와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그간 이 조직에 많은 디지털 변혁 관련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고 성과를 달성해왔다. 사내 밴드의 드러머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안경테 색깔을 그때 그때 전달하는 메시지의 특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매치하여 사진이나 영상자료에 등장하곤 하는, 그 나이대 대기업 중역으로서는 상당히 재치있는 센스를 가진 사람이었다.

문득 나는 내 이민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조직에서 보낸 기간을 정산해보았다.

첫 2년은 다른 도시의 두 개의 다른 직장을 거쳤으며, 그리고 이 곳에서의 첫 부서에서 비록 9개월짜리 계약직 자리이긴 하지만 더이상 한국 교민사회 혹은 주재원사회로 불리우는 한국계 기업 해외지사 생활을 벗어나서 현지기업 근무경력을 쌓고 현지의 직업시장에 당당하게 한 자리 비집고 들어가 보려는 그당시 나름 투철한 의지로 선택한 그 첫 단추를 끼우면서 이 곳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벌써 4년이 넘는 시간 전의 일이었다.


4년 하고도 2개월. 오래도 있었다.


그리고 첫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을 느꼈다.

 


 

첫 부서는 9개월짜리 계약직이었고, HR 부서 중에서도 인재개발을 담당하는 인사 개발 및 인재관리(Development & Talent Management)를 하는 이었고 그곳에서 9개월 간 해외지사로 파견근무를 간 직원을 한시적으로 메꾸는 자리였으나 당시 HR은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던 때여서 9개월 뒤 운이 좋으면 같은 포지션이나 혹은 다른 포지션으로 해서 계약이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지만 그런 리스크를 다 감안하고 상호간의 동의하에 들어가게 된 곳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도시에서 다니고 있던 한국계 기업 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초짜배기 이민자이자 사회초년생이었고, 생각했던 것 보다도 너무 내가 한국에서 싫었던 부분들을 그 회사를 다니면서 한국을 벗어난 이곳에서 조차 보게되는 부분들에서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할 때였다. 그리고 어떤 기회든 나를 조금 더 큰 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맨땅에 헤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돌격 앞으로 할 수 있을 똘기어린 패기...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직도 20대 중반이었고 이민도 초기 정착단계였고 가진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그럴 때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감행 할 여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어라, 그래도 나 받아들여졌네? 그래 이제부터는 이렇게 좁다란 교민사회를 벗어나서 기왕 깨지고 기왕 망해도 현지사회에 한결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물에서 놀자 라는 마음. 그리고 큰 기업의 본사, 그것도 HR. 나는 계약직이지만 인턴사원도 아닌 그냥 평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로 뭔가 좀 되는 사람이라는 자뻑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자뻑으로 인하여 엄청난 메가톤급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와 앞통수를 차례로 가격당하며 고꾸라지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했던 것, 상상했던 것, 기대했던 것과 달랐고 그 당시 팀원들은 아무리 HR이라지만 정말로 여초였으며 다른 이웃 HR팀들에 비해서도 다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드세고 남의 말 하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gossiper 들이었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생판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하나 계약직을 달았지만 자기네 조직에 들어와서는 자기들 여왕벌들에게 사바사바도 안하고 외따로이 구는 듯해 보이는 모양새를 보고 견제에 들어갔던 것 같다.

솔직해지겠다. 나는 그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더 큰 실망은, 내가 왜 붙었는지가 이해되면서 들기 시작한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던 것이다. 값싸고 멋모르는 이민온지 얼마 안된 여자애. 그리고 당시 맨땅에 헤딩도 불사를만큼 똘기와 패기로 무장한채 면접을 쌈싸먹는 신공을 발휘한 여자애.
젊고 의지력 강해보이고 뭔가 용기있어보이는 프런티어정신으로 똘똘 뭉쳐보이는 여자애에게 기회 한번 주면서 게다가 몸값도 그당시 기준으로 다른 중견 직원들에 비해 훨씬 쌌을 것이고 그래서 그냥 들어와서 이거저거 일 좀 시켜보면서, 그런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맹탕이네? 그래 그도 그럴것이 내가 이전까지 했던 일들은 이메일 포워딩하고 커스토머서비스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종 혹은 어시스턴트, 그 제일 마지막 한국계회사에서도 HR및 General Affair 부서 소속으로 한국인 CEO의 비서겸 주재원들 HR적 행정 처리 서포트겸 주로 사무용품 재고 담당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좀더 고차원적인 HR의 일을 담당해 본적은 없었다. 사실 그걸 원해서 그 9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을 계약직을 모든 리스크를 안고서 부여잡았던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 결국 나는 내가 잘나서 받아들여졌다기 보다는 얼굴마담으로 글로벌한 기업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 조직의 특성상 국적 구성 하나 더 추가하면서 싼값에 땜빵 돌려막기도 가능한, 잃을 것 하나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이 발현 되었다고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제는 정말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

기대와 실망, 그리고 실망을 하면 모든 희망을 다 잃고 행동이 엄청나게 위축되고 엄청나게 우울해지며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해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수긍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되바라지게 들이받지도 못하고 싫은 마음만 나날이 나날이 커져가고 그러다 급기야는 타인도 그것을 느끼게 되고, 타인들은 내가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나를 적대시하게 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며 우울의 나락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즉,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을 하면, 아주 깊고 짙은 슬픔의 나락으로 빠진다는 것.

점점 나의 행동들과 나의 마음가짐, 나의 불안감, 모든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키기 시작했고 5월 무렵 하여 계약 만료를 3개월 남짓 남긴 시점에서 계약연장을 못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당시 이전직장에서 3년짜리 노동가능한 비자를 소지했으나 회사를 옮기며 9개월로 비자기간까지 단축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온 상태여서 재계약이 안된다는 것은 비자도 연장이 안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앞이 깜깜했다. 나도 이런 부서에서 아무리 더 좋은 포지션으로 연장을 해준다해도 줘도 안할 상태였는데, 그런데 나는 비자에 종속된 신분이었다. 그때부터 백방으로 여기저기 지원서들을 돌리고 회사 내에도 다른 부서 다른 팀들에 난 공석들에 마구 지원을 했으나 한군데에서도 답을 듣지 못했었다.

 

 

(中편에서 계속)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0.01.2021

 


 

시간은 잘도 흘러, 팬데믹 쿼런틴 모드에 들어선지도 근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작년 3월 중순을 기점으로 전직원 홈오피스 체제에 들어갔으며, 상황이 조금씩 풀릴 때 마다 회사 문을 다시 열어서 사무실로 출근하고 싶은 사람들을 받곤 하였다.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나는 죄 받을 생각을 하나 품게 되었다.
코로나로 앞당겨진 전격적인 홈오피스 근무방식은 내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앗줄이었다.

언제나 혼자서 일하면, 집에서 일하면, 익숙한 공간에서 홀로 집중하여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종류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소원이 있었다. 마치 구약성경 속 천지창조 시대 노아의 대홍수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온 세상이 난리가 나도 나는 나만의 방주 안에서 훗날을 도모하며 바깥 출입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 없이 끝내주게 잘 살아낼 자신이 있었다.

메이저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회부적응자, 히키코모리가 될 소지가 다분한 등등의 낙인을 찍으려 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마이너이면서도 메이저가 되고싶어하는 열등감이 큰 사람이다. 내 마이너 근성을 드러내었다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메이저들이 내 가슴에 부착할지도 모를 주홍글씨를 얻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까지 메이저의 삶에 편승하는 체하며 지금까지 척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런 내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코로나시대의 죄 받을 수혜자로서, 나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스르르 다음의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말았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그토록 갈망해오던 재택근무를 이어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다양한 인간들과 대면상호작용을 하는 끔찍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면상호작용을 싫어하는 나를 싫어하는 다른 인간들로부터 나를 보호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좋지 않은 사람 어디있겠냐마는, 솔직히 같은 공간 공유하며 일할 때 무신경하고 시끄럽고 뻔뻔한
작자들을 안봐서 너무 좋고 앞으로도 안보고싶다.

이대로 영영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앞으로 이런식으로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재택으로 먹고사는 일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에게 모든 것을 한 번에 주는 법이 절대로 없다.
나는 위의 희망들을 품으며 잔혹한 죽음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와중에 마스크 속으로 숨길 수 없는 쾌재의 미소를 지어보인 대가로 다음의 것들도 덤으로 얻고 말았다.


사무실은 확진자의 숫자에 따라 유동적으로 열리곤 했으며 그때마다 팀빌딩을 중시하는 부장은 사람들을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게 하고 싶어했다.

나는 여지껏 그의 그러한 회유에도 철판 깔고 재택을 사수했다. 나는 그를 상사로서 존경하지만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었다. 그와 그 일로 은근하고도 뭉근한 냉전을 겪었다.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사무실의 존재는 나에게 생각보다 큰 예기불안을 안겨주었다.

불안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증세가 심해져서 비오틴 등이 함량된 영양제를 먹고 여성탈모전용샴푸를 생애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변변치 않아보였다.

고용시장 및 경제가 얼어붙었기에 퇴사를 하고 싶어도 자꾸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데 화가 쌓여갔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로 인해 엄청나게 긴급으로 필요한 포지션이 아닌 이상은 채용도 동결되어 부서 내에서 총무적인 일을 담당할 예정이던 직책도 함께 채용이 잠정 중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총무,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커리어의 사다리를 타고 겨우 프로젝트 코디네이팅을 하는 지금의 일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그런 나에게 상대적으로 업무에 유사성이 많다는 이유로 그 총무가 해야할 일도 겸업처럼 주어지게 되었다.


 

야심만만하게 전세계 수많은 나라에 지역별로 구매및 소싱을 위한 전사적 관리(ERP) 소프트웨어를 론칭하는 IT프로젝트 팀의 코디네이터가 되는 것으로 시작하면 (비록 초반에는 그토록 싫어하는 어드민적인 일들을 하긴 해야하지만)그래도 이력서 상에 IT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는 근사한 한 줄을 적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알량한 생각에서 시작된 지금의 포지션이었다. 전략적 일보 후퇴라 생각하고 나는 초반만 잠시 그런 잡무를 해주는 시늉을 하다가 프로젝트 매니저가되거나 아니면 프로젝트 예산을 관리하는 컨트롤러가 되거나, IT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며, 차라리 론칭하는 소프트웨어같은 SAP계열 ERP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러면 이민자로서 직업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기에는 그저그만인 이력이 될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나를 그저 갓 대학 졸업 후 최말단으로 들어와서 프로젝트 매니저의 어시스턴트나 해주는 정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받았다. 나는 이 포지션을 시작할 무렵만해도 20대 막차를 달리는 나이였다. 나는 그간 일을 꾸준히 해온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포지션들과 선형(linear)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여, 내가 지난 포지션들로부터 가지고 올 수 있는 적용가능한 스킬들 (transferrable skillset)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리려는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불안감이 급습하기 시작했다.


뭐지? 전략적 후퇴가 아니라 그냥 총체적 후퇴로, 과거에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어시스트, 어드민으로 전락한 후퇴인거였을까?

나는 그저 말단 정도로만 본다구? 지금 나이로는 만년 쥬니어레벨이 아니라 한단계 더 도약을 해야하는데 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게 뭐지?

기존의 직책에서 선형으로 이어지지 않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포지션이라고 중고신입으로 까고 들어가나? 이전에 맡았던 IT 체인지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롤도, 프로젝트들 론칭할때마다 밀접하게 일하며 프로젝트로 인해 도입되는 변화들을 커뮤니케이션하고 프로젝트 마케팅하는 일도 했어서 지금 하는 포지션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깡그리 무시할 게 아닌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건가?


나만... 이.렇.게. 생각했던 걸까?
아무도 나따위는, 커리어적으로 좀 자리잡아보려고 분투하는 외노자, 외국 출신 직원의 몸부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겠지? 나는 망하는걸까?

 

단순 어드민 업무들만이 많이 주어졌고 안그래도 다시 과거에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어드민 & 오퍼레이션 잡무 담당자로 추락하는 것인가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린 쐐기를 박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상사는 지난 2020년 3월 말 무렵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상사: 알다시피 올해는 채용이 동결되었고, 업무적 유사성도 있으니 네가 이 업무도 겸직을 해줘야겠어.

나: 그럼, 저는 월급을 좀 더 올려받게 된다거나 어떤 다른 혜택이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을 맡고난 이력이 나중에 제 커리어적으로 어떻게 활용이 가능할 수 있게 될까요? 이 일을 지금 이렇게 비상시로 겸직하게 되었다가 나중에 어떤 보상이 생길 수 있는 건가요?

상사: ... 그건 지금으로서는 확답할 수 없고,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다들 좀 희생이 필요해.

 


사실 부서 총무가 그 앞전 해인 2019년 가을에 사직을 하고 계속해서 길어지는 공석에 이상하게도 자꾸만 약간씩 불안했었다. 팀이벤트를 어시스트하고 부서에서 총괄하는 각종 프로젝트들의 월별 비용을 정산하는 총무적인 일을 기존의 프로젝트 팀을 위해 예산 트래킹, 인보이스 관리, 프로젝트 관련 프레젠테이션 준비 등을 하고있던 내게 엮고자 하는 상사의 시도는 그나름 꽤 타당한 솔루션이었다.


그래도 마냥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정말로 팀 어시스트겸 프로젝트 어시스트 만년 "어씨"로 남아서 인보이스 상의 금액이 안맞으면 관련 담당자 쪼으고 팔로우업하고 그런 일들을 해야하고 자율적으로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도입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의 욕구와는 정반대의 잡무들만을 퇴직하는 날까지 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부서내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을 예산 대비 월별 발생 비용 트래킹을 하는 툴을 론칭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냥 비용트래킹이나 하고 어씨만 하는게 아니라, 부서내에 기존에 없던,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툴과 프로젝트 진행 상태 리포팅 프로세스를 도입하는 일을 하면서 그 나름 하나의 Best Practice 기획을 해 보려고, 그리하여 프로젝트 어씨가 아니라 프로젝트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상사는 내가 떠나면 사람을 못구해서 망하는것을 알기에 내 내향적인 성향과 한번씩 문을 다시 여는 사무실에 끝끝내 출근 안하고 재택을 고수하려는 내가 짜증났겠지만 참아줬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와 가진 암묵적인 거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는 이런저런 자잘한 일들만을 하게 되며 내가 저평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휩쌓이게 되었다.

 

결국 이 우여곡절 끝에 2020년의 한 해는 저물었고, 연말에 상사는 나에게 연봉인상도 안되었고 여러가지로 희생을 하였으니 회사 내에서 퍼포먼스 좋은 직원들에게만 올해 주기로 한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고 하였다. 한화로 치면 170만원 정도 되는 월급 외의 금액이었다.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정말 감사하긴 했다. 그래도 이런 상사가 있어서 작년 한해 동안 무수히 치솟아 올랐던 퇴사욕구를 가까스러 누르며 오늘 까지 지내 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돈을 던져주고 입막음을 하며 신년에도 계속해서 나를 이런 용도로 쓰겠다는 의도이지 않는가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100일 뒤에, 내가 이 부서의 이 포지션을 맡은지 2년을 넘기게되는 5월이 될때까지 올해는 작년보다 나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예의주시 하며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매일 매일 마음이 널뛰기를 한다.

 

조금만 더 참아서 하던 일 하면서 지내볼까?
아니야, 직장생활은 정말 아닌것 같아. 마음 먹은 김에 이제는 정말 마음을 굳히자.



그래도 상사가 너를 인정해주려고 해.
상사로서 그는 참 매력적인 좋은 매니저야. 배울점이 많아.
동료들도 좋은 사람들이야.
단지 지금 하는 식의 일이 양에 차지 않는거야.


그런데 만일 네가 원하는 기획적인 업무를 하고 오퍼레이션에서 손을 떼게 되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행복할 자신 있어? 지금 하는 일 계속 해가면서 대체 커리어적으로 어떻게 되고싶은거야? 회사원생활 계속 하고싶은거야?
회사다니면 월급을 받고 이력서 상에 공백기 안생기는 장점은 있지만, 그거 이외에 정말로 사람들과 협업하고 그런 일들이 장기적으로 네가 원하는 일이 맞는거야?

남보기에 어떠한가를 따지기 전에, 너는 네 스스로가 어떤것 같아?

 

내 마음에서 이런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소란이 일고있다.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19.01.2021

 


2021년이 밝았다.
해외 이민 생활을 시작 한지 햇수로 7년차에 접어들었다.

해가 바뀌어도,
세상은 여전히 코로나의 시대이다.

그리고
나는,
하고싶다.

.
.
.
.
.
.

퇴.사.

 

 


 

부끄러움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껏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서른 몇 해를 넘기며 살아오는 동안 대체로 하고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온 것 같다. 언제나 더 많이 가졌더라면, 더 풍족한 환경이었더라면, 이러이러 했었더라면 하는 무수한 시나리오들을 차례로 나열 해 보며 현재를 축소시키는 고질적인 버릇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내 인생에 내 선택이 개입되지 않았던 순간은 거의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스스로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살아왔었노라고 고백하며 말문을 연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나 하고 싶은대로 살아오기는 했다만, 그 모든 선택들에 무조건 당당할 수만은 있는가 자문해보기로 했다. 그러자 조금씩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괜히 좀 부끄럽기도 해야 성찰적인 사람이 되는 것 마냥 스스로에게 일정량의 부끄러움을 슬쩍 강요해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여러날이 더 지나는 동안, 암만 자문을 해 보아도, 역시 나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우선은 그걸로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날들을 무수히 지나왔고 자주 수치심 같은 감정들에 놀아나기도 했다만, 적어도 그 자체로 부끄러움 많은 삶은 아니었다고 확신을 갖기로 하였다.

이로써 지금껏 내가 내려왔던 모든 선택들을 징검다리 삼아 딛고 올라 선 지금의 자리에서, 앞으로 내리게 될 선택에 대한 확신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에도, 지금 이곳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온 곳에서도 역시 비주류이다.
그래서 이런 인생에서, 메이저한 남들이 보기에 혀를 찰 수도 있을 마이너한 선택을 내리려고 한다.


햇수로 7년에 접어드는 이민생활을 하는 동안 세상에는 크고작은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일들은 마구자비로 일어나더니 급기야는 온 세상이 창궐하는 전염병 앞에 문을 걸어잠그는 팬데믹의 시대까지 도래했다.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시대.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이민가방 두개 달랑 들고 단신 이민을 감행한 내 나름 잔뼈 굵은 이방인이다.
나는 그동안 더 낳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이며 그래도 내가 내 자신을 부양해 온 이력이 붙은 근로자이다.

나는 자주 침울하고 예민해지는 우울불안장애를 앓고있기도 하다.
나는 문재가 제법 있는 줄로 착각하고 살았으나 알고보니 문제만 많은 꼴통이다.
나는 글을 짓는 예술가가 되고싶었지만 될 깜냥이 없어 슬픈, 한갓 예술가병 환자다.
나는 자기 손으로 생활비를 벌어내는 보통의 소시민적 삶을 유지하려는 생활인이다.

그래서 퇴사는 옵션이 되면 안되는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하고싶다. 이제는 더는 안되겠다.
이직도 하고 싶지 않고, 이 주류의 삶의 방식에서 자발적으로 나가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나는 그래서 다음 할 일을 마련해 놓지 않은 채로

스스로에게 약 100일 간의 시간을 주기로 하였다.
그 시간동안 나는 퇴사를 통보할 마음의 준비를 다져보기로 하였다.

이 선택을 내리고자 하는 이유는,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남들 하듯이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럴때마다 자꾸만 내 자신에게는 어딘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은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려고 하는 것 같은 패러독스를 끝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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