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4.2021

 


 

[퇴사고민] | D-8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BY Birkenwald]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21.04.2021 ...

m.post.naver.com

 

[퇴사고민] | D-8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21.04.2021​이제 내가 그렇게...

blog.naver.com


 

 

이제 내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노래를 부르던 4월 말까지 8일 남았다.

미쳤다는 말 밖에는 안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하다.

그리고 하나도 미치지 않았다.

마음이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덤덤해진다.

어제 저녁, 빨래를 하려고 세탁기를 설치해둔 지하 세탁실로 내려갔다 오면서 우편함을 체크했다. 두 개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하나는 상사가 저번에 말한대로 급여인상에 관한 회사 인사부에서 온 우편이었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퇴사 후 어떤 식으로든 자영업을 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시청에 1인사업자 등록을 신청한 것에 대한 등록확인증이었다.

상반되는 성격의 우편물이 들어온 것이다.

내가 떠나려고 하는 일터에서는 급여를 올려주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혹시라도 떠난 뒤에 어떻든 쓰임이 될까봐 신청해 놓은 것도 거절당하지 않고 발급이 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런 기분이 들었다.

문은 생각보다 여러개일수있고, 문 하나가 닫히면 또 다른 문도 열릴 수 있고 그 문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할수도 있다는 것. 그 다양성에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내 머리로는, 내가 여지껏 경험 해 온 것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가늠 할 수 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하여, 무척 두렵고 불안하지만 내가 2015년도 1월 초에 이민가방과 수트케이스에 배낭을 매고 혈혈단신으로 이 땅에 도착했던 그때만큼 두렵고 불안할까 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마주하게 될 삶 앞에 당당히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떨치지 못했던 생각, 바로 "내가 또 도망치려고 하고 있는 걸까?" 에 대해서도 서서히 결말을 지어야겠다는 그 "결말"에의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내가 마주하기 싫은 불안으로부터 계속 도망쳐왔는데 도망생활중에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왔듯이, 내가 부모와 형제와 거기서의 모든 생활과 친구들과 모든 것들을 다 뒤로하고 와버린것이, 여기에 와서도 이리저리 표류한것이, 이제 또 부서까지 바꿔가며 4년 반정도를 끈덕지게 버텨온 이 곳을 나가려는 생각을 품는 것이 모두 도망치는 것, 도망의 역사 - 그래, 도망이라면 도망 맞는 것 같다.

이 세상은 도망치는 행위를 싫어한다.

도망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고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고 그것은 미성숙한 것이며 끈기없고 형편없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것이 싫어서 더욱 더 회피에 회피만을 거듭 해 온 것 같다.

내가 도망치려고 해 왔던 것은, 결국 그런 내면의 수치감을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를 상처준 사람들,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장소, 공간들, 내가 거기서 겪었던 암울했던 시간들, 기억들, 그 시간들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 그 감정의 기억들, 내가 주목받고 싶었는데 주목 못받은 것들, 내가 다 컨트롤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것들, 나를 우습게 본 사람들, 그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 못한 무능력했던 나자신, 그렇다고 그 능력치를 막 끌어올려서 출세하고 싶었는데 그럴 노력 기울이지 않았던 스스로의 나태함, 그 숱한 자기 비하, 자괴감, 자책감, 실망감들.

이제 내가 여기서마저도 또 도망치고 나서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을 하게 되면 거기서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보장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지금 발 딛은 곳을 떠나서 그 미지의 영역으로 도망을 쳐보고 싶단 말이다. 이것은 심령이 불안한자의 역마살 같은 것일까? 또 그렇다 한들, 그러면 정말로 안되는 걸까?

지금 내가 이렇게 덤덤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덤덤하면 안된다 그래도 된다 이런 법규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지금 현재 착 가라앉아서 덤덤하면 덤덤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러는 나에게 대책없이 꼴값 떤다고 할 것이고 더러는 나를 측은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볼 것이다. 더러는 날더러 앞날을 응원한다고 할 것이고 더러는 내가 뭘 하던 말던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현재 어떤 마음가짐이 드는지, 어떤 상태에 놓이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주체자는 바로 나다.

 


 

근속연수 2년을 꼭 채우는 것이 나는 왜 이토록 힘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 알량한 2년도 나는 여지껏 제대로 채운 적이 없어서 이제서야 그것을 채워볼것이라고 이토록 생색을 냈던 것일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을 붙들고서 말이다.

이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할 92일 정도 전에만 해도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을 끊을 수 없는 나 자신을 자책하고 사람들이 이런 나의 성향을 간파했을까봐 전전긍긍하고 그래서 이렇게 블로그 포스팅이라도 하면서 찌질한 속풀이를 한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까지 내 마음을 거쳐갔던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 수 많은 충동들과 동기들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런 감정들 그런 생각들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내가 내렸던 모든 행동들(선택, 행위, 말들 등등)이 생겨났던 것이고 그 행동들을 바탕으로 지금껏 겪었던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에 이정도로 마음을 정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다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서 하나의 커다란 테피스트리를 직조해오고 있었다.

그래, 나는 자주 불안했고, 싫은 것들도 많았고 그래서 자주 도망친다.

그렇게 도망쳐온것 치고는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리 나쁜 도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나는 더러 도망도 치고 그러면서 살아 갈 것 같다.

인간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지 않나 -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 이런 성향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더러는 날더러 포기하고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떤 말을 듣더라도 내가 내 도망에 떳떳하고 내 도망으로 따르는 모든 결과들을 그 모든 값들을 다 치러내면서 내 삶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누구도 원망않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삶도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두고 또 누군가는 어디서 자기합리화냐며 또 비난할지도 모른다.

비난은 내 삶이 지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것이다.

 

나는 결심하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상황이 닥치고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되고 어떤 말들을 듣게 되더라도, 심지어 엄청난 비난을 받게된다 하더라도, 나 자신만은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그 모든 상황들에서 무엇이든 한가지 이상은 배워갈것이며 나만의 인생 노하우로 적금들듯이 모아갈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원망할 것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할 것도,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 주눅 들 일도,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 앞에 은근히 우쭐 할 일도, 그런 모든 적나라한 찌질함을 탑제한 나라는 인간을 경멸할 일도 없어 질 것 같다.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11.04.2021

 

http://naver.me/FS6gOFCM

 

[퇴사고민] | D-18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BY Birkenwald]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11.04.2021 ...

m.post.naver.com

https://blog.naver.com/whiska/222306836504

 

[퇴사고민] | D-18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11.04.2021주말이 지나간다.일...

blog.naver.com

 


주말이 지나간다.

일요일 밤, 현지시각은 열시 사십오분.

지난 주 금요일 아침에 상사와 짧은 통화를 했다.

드디어 급여인상 컨펌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상사는 힘주어 말했다.

보통 2-3프로 정도밖에 인상 안되는데

너는 특별히 6프로나 인상 될 예정이야.

 

6프로라...!

그렇구나. 기어이 연봉이 인상이 되기는 될 모양이구나.

몇년 전에 한 번 2프로인가 그렇게 물가상승률에 맞춰서 오른 것 이후로 급여가 인상 된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떼어가는 이 나라의 특성상 세후 금액으로 보자면 별로 체감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상사가 "너는 그동안 너무 연봉이 안올랐으니 특별히 올려준" 그 6프로의 인상율을 적용해보자면... 사실 그렇다해도 세후로는 한화로 치면 십몇만원 정도 더 오르는 정도이다.

그래, 그 십몇만원이 어디냐만은. 그렇게 겨우 특별히 오르는것도 직장을 이직해서 연봉을 아예 처음부터 싹 갈아엎고 확 인상해서 가지 않는 한, 같은 조직 내에서는 6프로가 한계구나 싶었다.

사실 감사했다. 그래도 나를 좋게 봐주어 연봉을 올려 줄 생각을 해 주었다는 것이 고맙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퇴사를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졌다.

어제는 우편함을 열어봤더니 회사 인사부에서 보낸 편지가 들어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0년도 보너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번 달 월급날에 맞춰서 그 보너스가 들어온다. 내가 어제 때려치울까 오늘 때려치울까 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그래도 보너스받고 현재 직급 근속기간 무조건 풀로 2년 채우는 2021년 4월말까지 기다릴거라고 했던 그 시간이 다가오고 그사이 보너스도 확정이 났다.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아 챙겨서 나갈거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의 알량함과 옹졸함에 넌덜머리가 난다.


사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스스로와 했던 약속이 있었다.

절대로 상황이 불리하거나 안좋아졌을 때, 내가 화가 나 있을 때 나가지 않기로 말이다.

제일 이상적인 것은 박수 칠 때 나가는 것이겠지만, 박수받고 각광받는 것 까지 아니더라도 우선은 어느정도 평가도 괜찮고 인정 받았을 때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부정적인 부분들에 줄곧 관심을 할애 해 왔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죄다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이뤘다.

1. 한국계 회사, 교민사회를 벗어나서 현지회사 그것도 현지 굴지의 대기업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한 경험

 

2.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든 작금, 가장 전망 좋다는 IT부서로 옮겨 올 수 있었음

 

3. 한 조직 내에서 3개의 서로 다른 팀에서 지내며 근무기간 내 조직에 대한 시각을 다양화, 다각화 할 수 있었음

 

4. 프로젝트매니지먼트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경험 할 수 있었음

 

5. 지금껏 거쳐온 일들을 통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랑 어째서 안맞고 어긋나고 힘들고 괴로웠는지가 명확해졌음

 

6. 이 세개의 팀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일 국적 구성이 다양한 팀에서 근무 해 볼 수 있었음

 

7. 프로젝트 관련해서 팀원들과 출장도 비록 같은 나라이긴 했지만 2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음

 

8. 업무평가시 늘 개인 목표달성은 100프로를 넘기며 좋은 평가를 받았음

 

9. 작년 연말에는 연봉인상 동결로 인해 임금 인상이 안 된 대신에 열심히 일한 대가로 특별 보너스를 지급받았음

 

10. 올해에는 대부분 물가상승률에 따른 2퍼센트 정도의 연봉인상만을 받는데 특별히 더 많은 퍼센트로 드디어 급여가 올라가는 것도 경험하게 됨

 

이만하면 되었다.

정말로 분에 넘치게 많이 경험하고 많이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

안좋았고 서러웠고 내게 불리했고 슬펐고 분노했던 부분들을 다 걷어내고 보니 내가 그동안 꽤 많이 발전 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실 어떻게하면 퇴사 이야기를 잘 하고 최대한 퇴사 사유에 대해 가타부타 왈가왈부 없이 깔끔하고 멋지게 영광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를 놓고 여전히 고민중이다.

그 가운데 많이 의지하고 배울점 많은 지인분이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주었다.

비록 나를 조금 낮추는 듯 보이더라도 그들을 높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해주고 나오면 어떨까요?

나는 어떻게하면 거짓말 안하고 최대한 솔직하게 말할까를 놓고 고민했었다. 다른 핑계 대면서 나가면 정직하지 못한거니 내가 어째서 구체적으로 어떤게 도저히 안되어서 연봉도 올려주겠다고 하는 마당에 기어이 나가겠다고 하는지에대해 또 구구절절 다 읊을 생각을 했었다. 오직 나만을 생각한것이다. 나혼자 정직하겠다고, 나혼자 정당하겠다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나의 정직함 솔직함에서 했던 진실이 정작 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수도 있고 되려 그로인해 그들이 상처를 입거나 더 고까운 마음으로 나를 마지막까지 안좋게 기억하게 될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을 높여주는 방식으로는, 일단 그들의 입장에서 수긍하기 좋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누가 들어도 상황과 맥락을 생각 해 봤을 때 이해하기 쉬운 이유를 말해보는 게 어떻겠어요?

진실여부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들이라면 어떤 말을 들었을때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겠다는 나의 의사표현을 그래도 수긍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조언.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방식, 나의 성향, 특히 직장생활 조직생활 하면서 자꾸만 어긋났던 부분들을 계속 조직생활 직장생활만을 해온 사람들에게 곧이곧대로 말한다 한들 결국 더 손해보는 쪽은 내가 될수도 있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그동안 잘해주었던 점들에 대해 충분히 피력해주고 감사를 표해주고 최대한 나이스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향으로 놓고 생각해볼 것. 나를 낮춘다는 것은 저자세로 나가듯이 낮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믿는 것들을 잠시 양보하고 거기서 한 발 물러나서 조금 더 서로에게 win-win 될 수 있고 여러가지 충격들을 완화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서 최대한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일 짜증났던 것은 노티스 기간이 3개월인데 마지막 남은 한달 휴가처리 안되면 어쩌지 하면서 또 시나리오 틀어질까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도 그분이 이렇게 말해주셨다.

우리가 참 많은 것들을 컨트롤하고 싶어하죠. 특히 시간에 대해서 심해요. 그런데 우리가 당장 우리 목숨도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전혀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한번에 모든 것을 다 끝내실 수도 있는데 계속해서 매일 매일 우리 새로운 시간을 얻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굉장히 적고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시간도 너무 제한적이에요. 그 마지막 한 달 어떻게 될까 말까를 놓고 지금 고민하는 것도 어찌보면 굉장히 부질 없는 일일수도 있어요. 하루 하루 주어진 시간을 최선 다해서 살아가다보면 미래의 시간들에 대해서 그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다 알아서 가장 좋은 방식으로 처리 하실거에요.

여기에서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모든 것을 다 손아귀에 쥐고서 전전긍긍하며 내 마음대로 뜻대로 하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는지가 드러났다. 어쩌면 같은 말을 해도 저렇게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너무너무 고마웠다. 나라면 누군가에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서 저정도로 말 해 줄 수 없었을 것 같다.

'내가 또 지금 영역을 침해하려고 하고 있구나.'

'내가 내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고 남의 직분을 넘보면서 그것을 내 것인냥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돌아와서 최대한 충실하게 지혜롭게 주어진 시간들을 보내도록 해보자.'

이제서야 겨우 마음이 여기까지 정리가 된다.

다시 맞이할 월요일을 앞두고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한 주를 임해야 할지 그리고 그에 필요한 지혜를 구해야겠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너무나도 어렵다.

한고비씩 넘겨가면서 나무에 테가 늘어나듯이 내 지혜의 테도 점점 늘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복음 18장 14절>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08.04.2021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180013&memberNo=23031

 

[퇴사고민] | D-21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BY Birkenwald]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08.04.2021...

m.post.naver.com

https://blog.naver.com/whiska/222303677054

 

[퇴사고민] | D-21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08.04.2021​오늘 오후 프로젝...

blog.naver.com


 

오늘 오후 프로젝트 예산 스프레드 시트 업데이트 관련해서 프로젝트매니저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가 물었다.

요 근래들어 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던 거 같아.
뭐 특별히 애로사항이나 일과 관련해서 별일 없는거야?



그 말에 나는 특별한 것은 아직 없다는 식으로 애둘러말했다.
내가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뒤 퇴사를 이야기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늘 그런식으로는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나는 아직까지 퇴사 유예기간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프로젝트 롤아웃 일정들 관련해서 거기 직접 참여도 안하면서 그냥 일정만 잡아서 아웃룩 캘린더로 포워딩 해주는 것좀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그 업무가 나에게 온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거기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 직접 보내는 것이 컨트롤이 더 가능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업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는 그러면 각 롤아웃 담당자가 직접 하게 하도록 얼라인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다.
한달여 뒤, 마침내 회사를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을 전달 할 때, 나는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솔직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어떻게 그만둘지 뭐라고 말할지를 놓고 이토록 염려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타인의 반응을 염려하는 것일테다.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평판이 안좋아질까 안그래도 나간다는 마당에 마지막 남은 이미지라도 조금 쇄신해보고자 하는 저열한 욕구와 그런 어색하고 불편할 상황을 조금이라도 모면해보려는 몸짓이겠지.

 


 

결국 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그저 그 일들에 내가 거쳐가며 불협화음이 들었던 것이 모두 나로인해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 빼도박도 못하게 명백해졌다.
한가지 과거와 차이점이 있다면, 더이상 그로 인해 나 자신을 힐난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자책하지 않고 되려 평온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에고를 버리면 이 지점이 받아들여지면서 자유해짐을 느꼈다.

고맙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나의 기대하는 심리와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 자신의 지난날들의 그런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내렸던 모든 선택들의 결과이다.



내가 계속 타인에게, 어떤 일에 기대하게되는 이유도 이제는 명확해졌다.
이유는 결핍 때문이다. 스스로의 마음에 발생한 동공결절로 인하여 그 부족함과 헛헛함을 매우려고 계속 헛된 것들을 붙들고 채우고 쓸어 담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주 매달렸고 전전긍긍했으며, 사람들에게, 일자리에 과도한 것들을 기대했다. 그리고 대게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고 나는 매번 괴로웠고 분노했다. 
자기확신이 없으니 자꾸 눈치보며 동의를 구하게되었고, 스스로의 확신 없는 불안함을 매우기 위하여 입증하려고 했고 타인의 지지를 기대했으며 거의 열이면 열 충족되지 않은 기대로 인한 좌절감은 나의 자존감을 좀먹게했다. 관계에서도 나를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고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내가 스스로에게 찾아온 결핍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핍을 매우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결핍감을 끊겠다는 결단이 아니다. 결핍감은 끊겠다고 하여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핍을 해소하려면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떳떳하고 당당한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면서 주체적이고 솔직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주변 눈치 보고, 또 그게 잘 될지 안될지 불안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해소한답시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막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거기에 동의해주는지 아닌지, 그들의 미묘한 표정변화에 끄달리고 좌절하고 모멸감을 느끼고, 실재로 그들은 나에게 그런 감정을 줄 의도를 한 것도 아닐텐데도 내가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만들어갔던 것 같다.

인간에게, 그리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놓고 인간들을 모아서 일을 하도록 시킨 직장에 알량한 직급에, 업무에 목을 매고 그들로부터 어떤 유의미함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그런 허황됨을 버리겠다는 바로 이 결단이 필요하다.


퇴사를 하고싶어. 할까 말까? 하고나서 뭐하지?
엉엉엉 --- 할게 없어 그래서 두려워 엉엉엉--- 나좀 안아줘 엉엉엉--- 달래줘 --- 왜 날 안달래줘? 이 나쁜.. 이런식의 패턴들. 하도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와서 단박에 끊기조차 어렵게 질기고 질긴 내 악습.

 


 

자꾸 피하려들고 각종 핑계를 대서 결핍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시키려 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이런 행동들을 하며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을 내렸을때 발생할지도 모를 껄끄럽고 불편하고 어색할지도 모를 결과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나는 더 불안하고 조급하고 화나고 어색해졌고 슬퍼졌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말했다.

신경증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내 내면에 깔려있는 결핍으로 인한 파생물들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제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내면은 나의 삶을 잠식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고싶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아무 필요 없어, 세상적인 것들은 다 소용없으니 그들을 믿지마! 라고 돌아서 앉아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유한하고 흠 많은 인간들에게 어떤 숭고하고 대단한 무언가를 목매고 그들의 인정과 동의를 받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들도 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존재들이고 그 존재들의 집합이며 그런 곳에서 그런 인간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일들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폄하시키고 대충 될대로 되라 식으로 임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내 인생을 내맡겨 버리는 것도 좋지 않다.


너희는 더 이상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이사야서 2장 22절>

 

 

퇴사를 결심하는 것은 사실 둘째 문제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내려야 할 결단은 결핍과 열등감, 충족되지 않은 공허함에 무력해지더라도 반드시 거기서 벗어나겠다는 굳은 의지를 되찾는 것이다. 그래야 퇴사를 준비하는 지금에도,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시간들 속에서도, 앞으로 다른 무엇을 하며 살아가게 될 나의 미래에도 나는 그 무엇에 함부로 의지하지 않고 내 삶을 지어가며 살아 갈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