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6.01.2021

 


 

곰곰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왜, 어찌하여 그토록이나 지금까지 해왔던 종류의 일들과 지금까지 겪어온 대부부의 일들, 그 속에서의 나의 위치에 불만을 품어왔던 것일까?


왜 나는, 마치 "나만은" 더 높이 되는 일을 해야하고, 더 우아하고 폼나는 일을 해야하고, 돋보여야하고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걸까?
한번도 그런 삶을 살아온 역사가 없건만, 어찌하여 마치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생각을 해왔던 것일까?

이 부분을 놓고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몇 년에 걸쳐 성찰해보고 고민해보았다.
그때마다 번번이 내 안의 어떤 방어기제 같은것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비교적 최근에야, 이 부분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열등감과 우월감의 상관관계와도 같았다.

 

한국에서 보냈던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라 할 수 있는 대학시절,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방황하며 이런 저런 일들을 전전했던 시기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바닥을 친 자존감은 이곳으로 건너온 뒤에도 지금까지 크게 상승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자존감의 유무가 사람의 삶의 질을 이토록 좌우 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랍고도 놀라울 뿐이다.

[자기미움], 필로 이경희 저, 북스톤 출판

작년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는 열등감들과, 우월하고 돋보이고 싶은 욕망 사이의 줄다리기에 지쳐있었으며 그것을 파해치고싶은 갈증에 고조되어있었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책 제목은 [자기 미움]이었다.
내가 오래도록 품고 살았던 자책감, 수치심, 자괴감 그리고 분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한 권을 끝까지 다 읽는동안 많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 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죄책감이나 죄책감은 겸손도 자기반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의식적인 심리적 우월감 혹은 안정감과 만족감을 위한 전략이다.

지만 잘못된 전략이고, 결국 자기 자신이 희생자가 된다.
얼핏 납득이 어려울 수도 있다.

타인이나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심리인데 왜 이기적인가?

물론 제대로 된 자기반성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책감, 죄책감은 교묘한

이기적 심리가 더해져서 만들어진다. 자신의 '다른 모습'을 꿈꾸는 것이 그래서다.

일종의 자기배신이자 자기기만이다. 일단 기준을 높게 잡고, 그것에서 자기만족을 찾는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이런 존재야. 비록 실재로는 아니더라도.'
또는 이것은 심리적으로 버티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를 만들어 진짜 내 모습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두 모습 모두 오류다. 즉 본인이 생각하는 '못난 현재의 모습'도 진짜가 아니며,

또한 본인이 바라는 '뛰어난 자신의 모습'도 실제가 아니다.
그러고는 '현재의 모습'이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 스스로 정한 기준에 미달할 때 과도하게

자책하며 죄책감을 갖는다. 이처럼 비실용적인 우월감 혹은 심리적인 방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이라 표현한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내면에서는

실패하지 않고, 못나지 않고, 멋지고, 능력 있고, 잘하고 있는 나를 그림으로써

심리적 우월감, 만족감, 안심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의 나, 실제 상황과의 분리가 일어난다.

나아가 실제 나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실용적인 대응과

결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손해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실패한 이기심. 이것이 자책감과 죄책감의 실체다." - [자기미움] 42-44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사실 많이 울었더랬다.

내 스스로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던 내가 처했던, 그리고 여전히 처해있는 현실과 그 속에서의 나. 그리고 내가 되고싶어한, 내가 욕망한 기준 속에 있을 법한 상상 속의 나.
나라까지 바꿔서 살아보겠다고, 내게 어떤 유쾌함도 주지 못했던 한국을 벗어나서, 내가 내손으로 마련하고 빚어온 삶의 터전이 있는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쭈굴이" 신세, "시다바리"신세, 거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외국인 이민자로 어찌해도 빛나고 돋보일 수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있도록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이라는 것.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우월해질 수 있겠지,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발전하겠지, 이렇게하면 조금 더 스스로 긍지를 느낄 수 있겠지 하면서 살아왔지만 번번이 스스로에대한 의심과 자책감, 그리고 열등감은 곱절로 늘어갔다.

 


사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적인 잣대로, 세상적 수준의 - 다시말해, 인간적 이해와 지식의 차원에 입각한- 조언들과 해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점점 더 나의 마음을 만져주는 참 조언을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 조금 잘 되려고 할때는 우쭐거리며 자기영광만을 찾으려고 했으며, 조금 잘 안된다 싶으면 우울의 나락으로 빠지며 세상을 증오하고 내 자신을 죽일듯 미워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 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집착했다. 내 고민을 아무에게나 토로하고 징징대고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성급히 내리고 더욱 더 스스로를 우울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더 나은 직장을 가지면 지금의 고민에서 해결될거야, 더 나은 자격을 가지면 나아질거야 그래서 자격증 취득하는 것에 목을 매기도 했고, 이것만 하면 나아질거야, 이렇게 하면 될거야 저렇게 하면 될거야..

그와중에 나는 기도도 잘 하지 않았고 그나마 아침에 눈뜨면 성호긋고 늘 바치던 주님의 기도도 그냥 아무 영혼없는 웅얼거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종교활동이 금지되며 더욱 더 성당에 나가는 생활, 성경을 읽는 생활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던 차에 올 신년 초, 나는 한 유튜버를 알게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굴지의 대기업 CHRO자리에까지 고속승진하며 커리어의 최정점을 찍고 지금은 퇴사하여 구직난을 겪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과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유튜버 "퇴사한 이형" 이준희 대표님이었다.

그분의 채널이 제공하는 진솔하면서도 탄탄한 경험에 입각한 조언들에 감탄하며 그의 영상들을 보다가 아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사실 그는 크리스천이며 한 기독교방송에 출현하여 간증 형식으로 직장생활에 대처하는 올바른 크리스천의 자세에 대해 피력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믿음으로 고속 승진 할 수 있을까요? | 면접왕 이형 이준희 대표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직장 생활 꿀팁 좀 알려주세요""믿음으로 고속 승진 할 수 있을까요?"신앙인으로써 직장 생활 하는 방법 취업전문가 이준희 대표가 속 시원히 답변해드립니다. -이준희 대표前 대기업 최연소 최고인사책임자(CHO) 現 '면접왕 이형' 유튜브 채널 운영 -면접...

youtu.be/lwwQTu1tVVs

 

 

 


크리스천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이 거룩함이다.
어떻게 거룩함을 드러낼 것인가?
결국 세상사람들이 하지 않으려는 값 지불을 함으로서 거룩함을 실천할 수 있다.
다른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하면 되는 것 같다.
일이, 직무가, 직장이 우리가 부르심 받게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근사한 일일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근사한 일일때는 이게 정말로 나를 위한 부르심인 것 같다고 여겨 헌신, 순종,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아보이는 단순반복적이고 남들만을 위한 일일 때에는 전혀 그 반대의 길로 가게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본다.

그 작은 일에 충성될 때 하느님은 더 큰 일을 맡기시는데 그 충성을 다하지 않고
큰 일만을 바라는 것은 값지불이나 성경적인 차원에서의 올바른 직업관은 아닌 것 같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 내가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내가 인내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세상사람들도 그것을 높이 사 줄 것이다.

내가 인내하고 남들이 안하는 값을 지불을 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직장은 그것을 알아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늘 반짝반짝한 상태로 있기 보다는 흙속에 숨어있는 진주같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고,
꼭 세상적 고속승진이 아니라 해도 그 과정에서 내가 받은 은혜로, 인내로 살아간다면
영적으로는 큰 승진이 있지 않을까?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가상의, 환상속의 이미지로 빚어낸 우월감을 덧입혀가며 살아오고 있었던 나.
나는 열등감도 우월감도 모두가 마음에서 만들어낸 것들이지 실재하지 않은 것임을 머리로는 조금씩 이해하겠지만 여전히 마음으로부터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상태다.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할 부분 같다. 이것이 해결 되어야 내가 지금껏 해온 모든 고민들을 해결 할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퇴사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아니 직장에서 하는 일이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원래는 내가 원하기에는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하고 저것은 저렇게 되어야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 그런 모든 강박적 관념들. 그런것들 이면에 첨예하게 대립중인 열등감-우월감의 싸움.

그것이 진짜 문제였던게 아닐까.

 


 

저 영상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신갑주처럼 주신 무기가 있다.
감사, 순종, 헌신
이것이야말로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이다.
그 중에서 '헌신'이 모든것의 결론 같다.

 

개신교 가톨릭 종파를 초월해서,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떠나서, 누구든지 위의 말을 한번쯤 곱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한계가 많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래도 우리가 가진 무기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 뒤집어 엎고 싶을때라도 순종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갖는 것. 사실 그 마음을 가지면 많은 것들이 수월해질텐데 그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고 저항하면 할수록 갈등만이 생겨나고 힘들어졌으며 이기적인 자세만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비합리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순명하면서 인내하고 헌신하며 지내다보면 더 나은 상황이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참 못했다. 

여전히 내 마음은 갈대와도 같이 흔들린다.
조금 더 순종하고 인내하면 되는걸까?
두려운 마음,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볼까?
그러면 나 내 안의 열등감도 우월감도 다 부질없음을 완전히 깨우치고 거듭 날 수 있을까?

 

 

오늘은 그 어느 날 보다도 기도가 필요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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