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08.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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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고민] | D-21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BY Birkenwald]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08.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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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고민] | D-21 |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08.04.2021​오늘 오후 프로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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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프로젝트 예산 스프레드 시트 업데이트 관련해서 프로젝트매니저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가 물었다.

요 근래들어 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던 거 같아.
뭐 특별히 애로사항이나 일과 관련해서 별일 없는거야?



그 말에 나는 특별한 것은 아직 없다는 식으로 애둘러말했다.
내가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뒤 퇴사를 이야기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늘 그런식으로는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나는 아직까지 퇴사 유예기간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프로젝트 롤아웃 일정들 관련해서 거기 직접 참여도 안하면서 그냥 일정만 잡아서 아웃룩 캘린더로 포워딩 해주는 것좀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그 업무가 나에게 온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거기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 직접 보내는 것이 컨트롤이 더 가능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업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는 그러면 각 롤아웃 담당자가 직접 하게 하도록 얼라인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다.
한달여 뒤, 마침내 회사를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을 전달 할 때, 나는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솔직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어떻게 그만둘지 뭐라고 말할지를 놓고 이토록 염려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타인의 반응을 염려하는 것일테다.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평판이 안좋아질까 안그래도 나간다는 마당에 마지막 남은 이미지라도 조금 쇄신해보고자 하는 저열한 욕구와 그런 어색하고 불편할 상황을 조금이라도 모면해보려는 몸짓이겠지.

 


 

결국 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그저 그 일들에 내가 거쳐가며 불협화음이 들었던 것이 모두 나로인해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 빼도박도 못하게 명백해졌다.
한가지 과거와 차이점이 있다면, 더이상 그로 인해 나 자신을 힐난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자책하지 않고 되려 평온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에고를 버리면 이 지점이 받아들여지면서 자유해짐을 느꼈다.

고맙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나의 기대하는 심리와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 자신의 지난날들의 그런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내렸던 모든 선택들의 결과이다.



내가 계속 타인에게, 어떤 일에 기대하게되는 이유도 이제는 명확해졌다.
이유는 결핍 때문이다. 스스로의 마음에 발생한 동공결절로 인하여 그 부족함과 헛헛함을 매우려고 계속 헛된 것들을 붙들고 채우고 쓸어 담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주 매달렸고 전전긍긍했으며, 사람들에게, 일자리에 과도한 것들을 기대했다. 그리고 대게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고 나는 매번 괴로웠고 분노했다. 
자기확신이 없으니 자꾸 눈치보며 동의를 구하게되었고, 스스로의 확신 없는 불안함을 매우기 위하여 입증하려고 했고 타인의 지지를 기대했으며 거의 열이면 열 충족되지 않은 기대로 인한 좌절감은 나의 자존감을 좀먹게했다. 관계에서도 나를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고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내가 스스로에게 찾아온 결핍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핍을 매우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결핍감을 끊겠다는 결단이 아니다. 결핍감은 끊겠다고 하여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핍을 해소하려면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떳떳하고 당당한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면서 주체적이고 솔직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주변 눈치 보고, 또 그게 잘 될지 안될지 불안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해소한답시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막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거기에 동의해주는지 아닌지, 그들의 미묘한 표정변화에 끄달리고 좌절하고 모멸감을 느끼고, 실재로 그들은 나에게 그런 감정을 줄 의도를 한 것도 아닐텐데도 내가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만들어갔던 것 같다.

인간에게, 그리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놓고 인간들을 모아서 일을 하도록 시킨 직장에 알량한 직급에, 업무에 목을 매고 그들로부터 어떤 유의미함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그런 허황됨을 버리겠다는 바로 이 결단이 필요하다.


퇴사를 하고싶어. 할까 말까? 하고나서 뭐하지?
엉엉엉 --- 할게 없어 그래서 두려워 엉엉엉--- 나좀 안아줘 엉엉엉--- 달래줘 --- 왜 날 안달래줘? 이 나쁜.. 이런식의 패턴들. 하도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와서 단박에 끊기조차 어렵게 질기고 질긴 내 악습.

 


 

자꾸 피하려들고 각종 핑계를 대서 결핍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시키려 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이런 행동들을 하며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을 내렸을때 발생할지도 모를 껄끄럽고 불편하고 어색할지도 모를 결과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나는 더 불안하고 조급하고 화나고 어색해졌고 슬퍼졌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말했다.

신경증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내 내면에 깔려있는 결핍으로 인한 파생물들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제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내면은 나의 삶을 잠식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고싶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아무 필요 없어, 세상적인 것들은 다 소용없으니 그들을 믿지마! 라고 돌아서 앉아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유한하고 흠 많은 인간들에게 어떤 숭고하고 대단한 무언가를 목매고 그들의 인정과 동의를 받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들도 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존재들이고 그 존재들의 집합이며 그런 곳에서 그런 인간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일들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폄하시키고 대충 될대로 되라 식으로 임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내 인생을 내맡겨 버리는 것도 좋지 않다.


너희는 더 이상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이사야서 2장 22절>

 

 

퇴사를 결심하는 것은 사실 둘째 문제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내려야 할 결단은 결핍과 열등감, 충족되지 않은 공허함에 무력해지더라도 반드시 거기서 벗어나겠다는 굳은 의지를 되찾는 것이다. 그래야 퇴사를 준비하는 지금에도,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시간들 속에서도, 앞으로 다른 무엇을 하며 살아가게 될 나의 미래에도 나는 그 무엇에 함부로 의지하지 않고 내 삶을 지어가며 살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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