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5.05.2021


D-Day 그 후...

100일간의 퇴사유예기간을 거치고 난 뒤, 또 거의 한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퇴사고민 디데이 카운팅을 할 당시만 해도 5월중으로 퇴사의사를 전달해서 8월에 나오는 시나리오를 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5월 한달은 여기 저기 낀 공휴일에 하루씩 붙인 연차일로 주말까지 넉넉하게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몇일 내로 이번 달의 급여도 들어올 것이다.
이로써 한 달의 의무를 다하고 금전적 보상을 앞두는 닳고 닳은 직장인으로, 앞서 말했던 그 퇴사자유이용권은 아직 발효시키지 않은채로 여기 이렇게 있다.

나는 사실 그 발효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마지막 남은 모종의 "정당성" 같은 것을 찾고 있는 중일테다. 기어이 퇴사를 하고야 만 적법성, 타당성, 정당성 같은 것 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것들은 모두 너무나도 심리적인 차원의 것들이다. 심리가 복잡할수록 간단 명료하게 정당성을 정리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에고의 저항: 내 혀도 나를 기만하고...

주인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려해도 가지고 싶지 않은 저항의 마음이 컸다.

일의 의미와 가치, 보람은 스스로가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부여가 안된다. 그것도 역시 부여하고 싶지 않은 저항의 마음이다.

파랑새증후군인걸까.

궁극적인 불만족은 직장생활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드는 요즘.

그래서 이런 이런 업무는 싫고 이게 안맞고 이런걸 시키는 누구누구가 마음에 안들고 등등등 그랬던 것이다. 이런 단편적인 예시들, 겉으로 드러나는 일들만을 가지고 핑계대듯이 싫은 이유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뒤돌아 생각해보면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 강한 저항감을 느꼈다.

- 권위주의적인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게 지시하는 것

- 푸쉬 당하는 것 & 누군가를 푸쉬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

- 남에게 계속 설명, 교육시키고 이해시켜야하는 것

- 남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맞춰주고 만족시켜야하는 것

- 이사람 저사람과 조율하고 맞춰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고 그 전달 받은 사람이 한 후속질문들을 다시 그 처음의 이사람 저사람에게 가지고가서 전달해서 또 그들이 뭐라고 하는 것을 다시 전달 받을 최종 그 사람에게 전해주는 짓거리는 정말 하고싶지않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까지 다다랐을 때, 이메일을 읽던 도중 처음으로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욕설의 악령이 내게 씌인 것 같았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아이 ㅆ ㅂ, 궁금하면 니가 직접 물어봐라.

이 ㄱ ㅅ ㄲ 야!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혼자서 쌍시옷 들어가는 동일한 욕설이 마치 틱장애처럼 터져나왔다.
가끔은 미팅콜에서 내가 발언을 안해도 되는 때에 마이크 음소거 상태에서도 욕설을 내뱉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루를 보낸 뒤에는 밀려드는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상황이 더러워도 절대 욕은 하지말자 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욕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게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구나.
어쩌면 이렇게 손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나는 이제 하다하다 욕설 틱장애까지 생기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쌍시옷자 들어가는 두 글자 욕설은 여성을 비하하며 지칭하는 말까지 붙어져서 세 글자 낱말로 입에 착 붙어버리더니 마치 내가 내 자신에게 나라는 여자에게 그런 욕을 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식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불쑥불쑥 터져나왔다.

아아.. 내 혀도 나를 기만하는구나.


고용살이의 한계에 매몰 되고 말 것인가?

요약을 해보자면 남이 시키는 일을 남을 위해 하는 게 싫었던 거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임노동자로 고용살이를 하는 것은 그 임을 주는 사람의 일을 해준다는 것인데, 일을 시키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중도 저 싫으면 절을 떠나랬다고 그러면 나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직장인, 근로자라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는 것이라면 나는 직장을 떠나는 것이 정말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직장은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두고 평생 다니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이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 다음에서부터 죽기 전날까지 먹고 살 방안만이 해결된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간단하고 마음 편한 선택이 아닐 수 없겠는가. 돈은 늘 필요한데 그걸로 입에 넣어 줄 것들, 몸에 걸칠 것들, 한 몸 뉘일 공간과 그 공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야 한다. 죽기 전날까지, 아니 심지어는 죽고나서도 내 시신을 처리하고 장례를 치를 비용이 드는 판국이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언제 몇년도 몇월 몇일 몇시에 죽게 될 것이라는 날을 받아놓고 살지 않기에 언제나 만일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진지를 구축한다는 마음으로 살게된다.

자기만의 일을 마련해서 스스로 일하면서 재화를 창출해내는 일을 해야 더이상 임노동자살이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프리랜서나 이런저런 또다른 형태의 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면 모든 리스크관리, 분쟁관리 등등 임노동자로 있을 때 그 임을 시켜주던 곳에서 담당해주던 것들을 고스란히 혼자 해내야한다. 그럴 자신 있는가? 우선 당장 팔 수 있는 게 있고 고객이 있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홀로 섰을 때 모든 것을 다 감당하고 처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이미 최저의 사업아이템도 있고 고객이 제아무리 덤프트럭으로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게 안되면 아무것도 안될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템과 고객만 확보되면 다 될거라도 생각하지만 나는 되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하느님 한 분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는가?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내 마음을 계속 찜찜하게 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저런 저항감들과 저런 마음가짐들이 너무나도 크리스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종하지 않고 판단하고 자아를 죽이지 못하고 딴딴한 똥고집으로 발전해가고 있으며 저항감, 즉 컨트롤하고 싶은데 컨트롤 못하는데서 오는 화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 믿고 맡기면 되는데 믿고 맡기는 동안 저걸 계속 유지하며 해나가기가 싫다는 마음으로 인해서 저항감을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이쯤되니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 맨날 이렇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나를 설득시키고 마음을 비워내야만 하나, 그렇게 안하고도 의미가 스스로 나에게 부여를 해주고 상황이 알아서 나를 설득해주는 식으로 반대로 가면 안되나. 제발 한 번만 그렇게 해보고싶다. 아닌가, 내가 끝까지 잘못 생각하는건가.. 내가 나쁜건가. 그런데 나만 이런가? 억울하다 억울해 이런 억화심정이 든단말이다.

아무리 이땅에는 우리를 위한 도성이 없고 우리는 저 하늘나라 본향에 돌아갔을 때 상급으로 받을 더 높은 차원의 것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아무리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일에도 충성되고 작은 일에 열심한 착한 종에게 열고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읽어도... 내 에고차원의 이 마음의 부대낌을 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걸까.
나는 그저 미성숙한 사고관을 아직 버리지 못한 철없는 사람에 불과한걸까.
아니면 정말로 다른 저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리를 잘 못 찾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계속해서 주저했던 이유

그만두기를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게 아닐까?

이제 왜 싫은지도 알겠고 다 알겠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 망설여지고 떨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이런 마음가짐의 변화가 가능할지.. 이게 직장을 나왔는데도 지속될 마음가짐이면 어쩌나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만 해결되면, 여기에만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정말 마음 정리 산뜻하게 해서 손털고 나와서 휴식기도 좀 갖고 하면서 재충전해가면서 다음 길을 모색 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이유로 누가 일 시키는게 싫어서 나왔다 치자, 그런데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한 일에서도 싫음이 감지된다면 그때는 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실 여기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인 것이다.

싫어서 도저히 하기 싫고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두고 그 자리를 뜨고 그 사람과 손절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싫고 싫고 또 싫지만 이번에는 나는 이렇게 한 번 해보겠다 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면 앞으로 살면서 또다른 싫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한결 대처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싫고 싫고 싫은거 겨우겨우 버티고 참으면서 숱한 때려칠 위기를 넘기면서 이정도까지 버텨왔으면 괜찮지 않나 그런 마음이 올라오는게 사실이다.
특히 불확실함과 예측하지 못한 난관을 만났을 때 대응하고 대처하는 coping skill 을 향상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까? 그냥 현실을 수용하기만 하면 되는걸까? 그러면서 더 큰 목적을, 더 큰 그림을 내다보면 버틸 수 있는걸까? 버티고나서 내가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


나도 밥상 그만 차리고 대신 그거 한 번 받아보고 싶다!

어드민적인 일, 서비스적인 일들을 그토록 하기 싫었던 것도 다 연결 되어있는 것 같다. 특히나 이런 업무들이 위에 열거한 내가 특히 싫었던 모든 것들이 집대성된 결정체였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맡으면서 쌓이고 쌓인 불만족은 분노로 발전했고 트라우마적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기미만 보여도 마음 속에서 경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 가치가 어떤 특정한 업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고 영향받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독 그게 싫어진다. 지금도 너무 싫다. 싫어서 어떻게든 안해보려고 하고 그걸로 알게모르게 사람들과도 부딪힌다.
그러니 더 싫다. 저항감만이 샘솟는다.

내가 안그래도 지시받고 하달받아서 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돈을 벌어야하는 직장인이라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어서 하지만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다른 동료들의 편의를 봐주는 업무까지 더해지면서 이중으로 종살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직장인으로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대신에 나도 가끔은 남들이 차려주는 밥상 받아보고 싶다. 밥상 차리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 내가 뭘 하는데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뭘 개설해주고 프로젝트 관련해서도 축하할 일이 생기면 다른 누군가가 프로젝트 팀을 위해 뭔가를 마련하면 나는 그 팀원의 한명으로서 그걸 받아먹고싶다. 더이상은 챙겨주는거보다도 챙겨짐 받고싶다. 그래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막 지시를 누구에게 내린다거나 결제를 한다거나 보고를 받는 위치에 있고싶다는게 아니다. 그럴 의사도 없다. 그런데 다만 밥상차리는거 이제 그만하고 싶다. 정히 차려야한다면 이런이런 레시피로 차리는게 어떨까요? 정도로 제안하거나 자문하는 역할을 하고싶다. 그것도 안된다면 미련없이 나오고싶다. 도저히 더는 싫다. 싫다. 싫다. 싫단말이다.
밥상 그냥 안차리고 나올테니, 니 밥은 니가 알아서 차려먹고 나도 대신에 니가 차려준 밥 기대 안할테니 밥 안차리고 안먹고 손털고 나올란다. 우리 깔끔하게 이렇게 퉁치자. 그리고 끝내자. 잘있거라.
솔직히 지금 이런 심정이다.


정말 이게 최선인가요? 다른 대안은 없나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누가 시켜서 차리는 밥상 말고 내가 차리고 싶어서 내가 제안해서 차리는 밥상이라면?
서비스는 누군가의 니즈를 충족하는 솔루션이다. 이 솔루션을 제공하는 대가로 비즈니스가 이루어진다. 회사는 그걸 규모가 크고 세분화시켜서 하고 있는 집단이고 그 집단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한 일원으로서 회사원, 사무원들은 그중 한 보직을 맡아서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마련한 내 서비스로 누군가의 니즈를 충족하는 일이라면? 내가 자발적으로? 그래서 물론 그 솔루션이 성공적이지 못하거나 솔루션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거나 없는 일이 발생한다하여도 그래도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조금 더 보람이 들 것 같은가?
이것은 해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해보는 쪽으로 밀고 나가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그렇게 해보는 것으로 결정해서 해볼 수 있을 것 같은가?
거기서 예상되는 리스크나 어려움들, 장애물들은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그래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자신감은 최소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막상 못하고 있는가?
불안함이 엄습하는데 불안 말고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옵션을 선택해 볼 수 있을까?


시각의 재구성: 현명한 선택을 위하여

이쯤 되고보니 정말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선택, 지금까지 이러이러했다면 여기서 잠깐 을 외치고 이번에는 이런식으로 접근해볼까 라는 관점을 택할지 말지도 선택, 지금까지 싫고 싫고 싫어서 죽을 것만 같던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도 다시한번이라는 심정으로 한번 범죄의 재구성처럼 감정의 재구성, 기억의 재구성, 경험의 재구성을 해 볼지도 선택.

모든 선택에는 그 선택에 따르는 득과 실이 있고 치러야 할 값이 있다.
기존의 렌즈 말고 다른 렌즈를 써서 동일한 사건이라도 조금 더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선택도 그 선택으로 인해 수반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을 내려보면 다른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5월 중으로 사직 의사를 표명하겠다는 첫번째 시나리오를 실행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대신에 6월까지 한 달을 더 두고 보면서 그 사이에 정말로 내가 퇴사를 하고자 하는 이유를 조금 더 명확히 하고 싶다. 사실 이미 마음은 애저녁에 떠났다 하더라도 그래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고는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다.

1.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일을 해야 즐겁고 그 일을 하기 위해 구체적 계획 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방향성"을 세워 볼 수 있을까?

2. 막상 사회적 신분 같은 것을 보장해주던 직장생활을 한국도 아닌 이곳에서, 더욱이 여기서는 한 번도 무직이었던 적이 없었던 상황인데 그 직장생활을 그만 두었을 때 마주하게 될 현실들을 잘 감내 해 볼 자신이 서는가?

3. 먹고 살기 위한 기술을 배워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것도 계속 분야를 찾겠지만, 오롯이 자기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해 봄직한 것을 반드시 한 가지는 찾아보자. (여기에 대한 답은 이미 찾은 것 같다)


특히 1번, 스스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답을 달 수 있게 된다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장에서 무슨 일을 맡게 되든, 세상을 살면서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며, 그 ☆☆됨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중에 지금은 ◇◇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라는 방식으로 시각을 전환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하고 있는 ◇◇가 내 ☆☆됨과 등가관계가 아니듯, 내가 ◇◇를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중이라 하여 내가 ☆☆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유예기간이자 고민기간이었던 100일간의 디데이 카운팅이 끝난 후에도 사실 궁극적인 고민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계속 고민을 위한 고민만을 하기보다는 이제는 액션플랜을 세워야 할 때이다.

에필로그는 이 뒤로도 적어도 한 두 번은 더 올리게 될 것 같다.

그 뒤에는 바라건대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챕터로 넘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미 조금 더 단단하고 명료해진 마음가짐으로 새로이 설정한 인생의 방향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