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1.01.2021

 


 

어제 오후에 회사 대표가 전직원에게 보내는 뉴스레터 공문 이메일이 한 통 들어왔다.

또 무슨 소식을 나누시려고 그러나 하고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다름아닌 회사의 CIO가 5월 31일자로 퇴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의에 의해 떠나는 것이며 다른 산업군의 다른 기업의 직책을 맡아서 간다는 내용만이 나와있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직접 그 CIO가 짧막한 영상메시지를 만들어서 또 전직원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비록 어제 발표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상 속 그는 차분한 표정이었으며, 이 나라는 퇴사를 하게되거나 당하게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상호간에 3개월의 노티스 기간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는 5월 말까지 인수인계를 하고 여러가지 신변정리를 하는 기간으로 삼을 것이다. 아직 후임은 구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각 영역별로 소위 말하는 C자 들어가는 (CEO, CIO, COO, CHRO 등등) 경영진 중에서 IT 담당 답게, 그러나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열정적이고 유능한 멤버였던 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오래 남을 줄 알았으며,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가 길어지고 있는 시국에 회사 내 IT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하게 급부상하고 있는 시점에 그 수장인 사람이 사임을 한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바로 그때문에 그는 더욱 더 자신의 유능한 날개를 펼치기 위하여 그의 능력을 원하는 곳으로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조직에 CIO로 영입되어 와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그간 이 조직에 많은 디지털 변혁 관련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고 성과를 달성해왔다. 사내 밴드의 드러머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안경테 색깔을 그때 그때 전달하는 메시지의 특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매치하여 사진이나 영상자료에 등장하곤 하는, 그 나이대 대기업 중역으로서는 상당히 재치있는 센스를 가진 사람이었다.

문득 나는 내 이민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조직에서 보낸 기간을 정산해보았다.

첫 2년은 다른 도시의 두 개의 다른 직장을 거쳤으며, 그리고 이 곳에서의 첫 부서에서 비록 9개월짜리 계약직 자리이긴 하지만 더이상 한국 교민사회 혹은 주재원사회로 불리우는 한국계 기업 해외지사 생활을 벗어나서 현지기업 근무경력을 쌓고 현지의 직업시장에 당당하게 한 자리 비집고 들어가 보려는 그당시 나름 투철한 의지로 선택한 그 첫 단추를 끼우면서 이 곳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벌써 4년이 넘는 시간 전의 일이었다.


4년 하고도 2개월. 오래도 있었다.


그리고 첫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을 느꼈다.

 


 

첫 부서는 9개월짜리 계약직이었고, HR 부서 중에서도 인재개발을 담당하는 인사 개발 및 인재관리(Development & Talent Management)를 하는 이었고 그곳에서 9개월 간 해외지사로 파견근무를 간 직원을 한시적으로 메꾸는 자리였으나 당시 HR은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던 때여서 9개월 뒤 운이 좋으면 같은 포지션이나 혹은 다른 포지션으로 해서 계약이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지만 그런 리스크를 다 감안하고 상호간의 동의하에 들어가게 된 곳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도시에서 다니고 있던 한국계 기업 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초짜배기 이민자이자 사회초년생이었고, 생각했던 것 보다도 너무 내가 한국에서 싫었던 부분들을 그 회사를 다니면서 한국을 벗어난 이곳에서 조차 보게되는 부분들에서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할 때였다. 그리고 어떤 기회든 나를 조금 더 큰 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맨땅에 헤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돌격 앞으로 할 수 있을 똘기어린 패기...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직도 20대 중반이었고 이민도 초기 정착단계였고 가진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그럴 때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감행 할 여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어라, 그래도 나 받아들여졌네? 그래 이제부터는 이렇게 좁다란 교민사회를 벗어나서 기왕 깨지고 기왕 망해도 현지사회에 한결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물에서 놀자 라는 마음. 그리고 큰 기업의 본사, 그것도 HR. 나는 계약직이지만 인턴사원도 아닌 그냥 평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로 뭔가 좀 되는 사람이라는 자뻑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자뻑으로 인하여 엄청난 메가톤급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와 앞통수를 차례로 가격당하며 고꾸라지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했던 것, 상상했던 것, 기대했던 것과 달랐고 그 당시 팀원들은 아무리 HR이라지만 정말로 여초였으며 다른 이웃 HR팀들에 비해서도 다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드세고 남의 말 하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gossiper 들이었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생판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하나 계약직을 달았지만 자기네 조직에 들어와서는 자기들 여왕벌들에게 사바사바도 안하고 외따로이 구는 듯해 보이는 모양새를 보고 견제에 들어갔던 것 같다.

솔직해지겠다. 나는 그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더 큰 실망은, 내가 왜 붙었는지가 이해되면서 들기 시작한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던 것이다. 값싸고 멋모르는 이민온지 얼마 안된 여자애. 그리고 당시 맨땅에 헤딩도 불사를만큼 똘기와 패기로 무장한채 면접을 쌈싸먹는 신공을 발휘한 여자애.
젊고 의지력 강해보이고 뭔가 용기있어보이는 프런티어정신으로 똘똘 뭉쳐보이는 여자애에게 기회 한번 주면서 게다가 몸값도 그당시 기준으로 다른 중견 직원들에 비해 훨씬 쌌을 것이고 그래서 그냥 들어와서 이거저거 일 좀 시켜보면서, 그런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맹탕이네? 그래 그도 그럴것이 내가 이전까지 했던 일들은 이메일 포워딩하고 커스토머서비스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종 혹은 어시스턴트, 그 제일 마지막 한국계회사에서도 HR및 General Affair 부서 소속으로 한국인 CEO의 비서겸 주재원들 HR적 행정 처리 서포트겸 주로 사무용품 재고 담당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좀더 고차원적인 HR의 일을 담당해 본적은 없었다. 사실 그걸 원해서 그 9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을 계약직을 모든 리스크를 안고서 부여잡았던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 결국 나는 내가 잘나서 받아들여졌다기 보다는 얼굴마담으로 글로벌한 기업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 조직의 특성상 국적 구성 하나 더 추가하면서 싼값에 땜빵 돌려막기도 가능한, 잃을 것 하나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이 발현 되었다고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제는 정말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내 성격의 치명적 단점.

기대와 실망, 그리고 실망을 하면 모든 희망을 다 잃고 행동이 엄청나게 위축되고 엄청나게 우울해지며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해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수긍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되바라지게 들이받지도 못하고 싫은 마음만 나날이 나날이 커져가고 그러다 급기야는 타인도 그것을 느끼게 되고, 타인들은 내가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나를 적대시하게 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며 우울의 나락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즉,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을 하면, 아주 깊고 짙은 슬픔의 나락으로 빠진다는 것.

점점 나의 행동들과 나의 마음가짐, 나의 불안감, 모든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키기 시작했고 5월 무렵 하여 계약 만료를 3개월 남짓 남긴 시점에서 계약연장을 못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당시 이전직장에서 3년짜리 노동가능한 비자를 소지했으나 회사를 옮기며 9개월로 비자기간까지 단축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온 상태여서 재계약이 안된다는 것은 비자도 연장이 안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앞이 깜깜했다. 나도 이런 부서에서 아무리 더 좋은 포지션으로 연장을 해준다해도 줘도 안할 상태였는데, 그런데 나는 비자에 종속된 신분이었다. 그때부터 백방으로 여기저기 지원서들을 돌리고 회사 내에도 다른 부서 다른 팀들에 난 공석들에 마구 지원을 했으나 한군데에서도 답을 듣지 못했었다.

 

 

(中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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