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20.01.2021

 


 

시간은 잘도 흘러, 팬데믹 쿼런틴 모드에 들어선지도 근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작년 3월 중순을 기점으로 전직원 홈오피스 체제에 들어갔으며, 상황이 조금씩 풀릴 때 마다 회사 문을 다시 열어서 사무실로 출근하고 싶은 사람들을 받곤 하였다.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나는 죄 받을 생각을 하나 품게 되었다.
코로나로 앞당겨진 전격적인 홈오피스 근무방식은 내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앗줄이었다.

언제나 혼자서 일하면, 집에서 일하면, 익숙한 공간에서 홀로 집중하여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종류의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소원이 있었다. 마치 구약성경 속 천지창조 시대 노아의 대홍수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온 세상이 난리가 나도 나는 나만의 방주 안에서 훗날을 도모하며 바깥 출입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 없이 끝내주게 잘 살아낼 자신이 있었다.

메이저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회부적응자, 히키코모리가 될 소지가 다분한 등등의 낙인을 찍으려 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마이너이면서도 메이저가 되고싶어하는 열등감이 큰 사람이다. 내 마이너 근성을 드러내었다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메이저들이 내 가슴에 부착할지도 모를 주홍글씨를 얻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까지 메이저의 삶에 편승하는 체하며 지금까지 척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런 내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코로나시대의 죄 받을 수혜자로서, 나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스르르 다음의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말았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그토록 갈망해오던 재택근무를 이어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다양한 인간들과 대면상호작용을 하는 끔찍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면상호작용을 싫어하는 나를 싫어하는 다른 인간들로부터 나를 보호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좋지 않은 사람 어디있겠냐마는, 솔직히 같은 공간 공유하며 일할 때 무신경하고 시끄럽고 뻔뻔한
작자들을 안봐서 너무 좋고 앞으로도 안보고싶다.

이대로 영영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앞으로 이런식으로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재택으로 먹고사는 일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에게 모든 것을 한 번에 주는 법이 절대로 없다.
나는 위의 희망들을 품으며 잔혹한 죽음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와중에 마스크 속으로 숨길 수 없는 쾌재의 미소를 지어보인 대가로 다음의 것들도 덤으로 얻고 말았다.


사무실은 확진자의 숫자에 따라 유동적으로 열리곤 했으며 그때마다 팀빌딩을 중시하는 부장은 사람들을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게 하고 싶어했다.

나는 여지껏 그의 그러한 회유에도 철판 깔고 재택을 사수했다. 나는 그를 상사로서 존경하지만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었다. 그와 그 일로 은근하고도 뭉근한 냉전을 겪었다.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사무실의 존재는 나에게 생각보다 큰 예기불안을 안겨주었다.

불안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증세가 심해져서 비오틴 등이 함량된 영양제를 먹고 여성탈모전용샴푸를 생애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변변치 않아보였다.

고용시장 및 경제가 얼어붙었기에 퇴사를 하고 싶어도 자꾸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데 화가 쌓여갔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로 인해 엄청나게 긴급으로 필요한 포지션이 아닌 이상은 채용도 동결되어 부서 내에서 총무적인 일을 담당할 예정이던 직책도 함께 채용이 잠정 중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총무,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커리어의 사다리를 타고 겨우 프로젝트 코디네이팅을 하는 지금의 일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그런 나에게 상대적으로 업무에 유사성이 많다는 이유로 그 총무가 해야할 일도 겸업처럼 주어지게 되었다.


 

야심만만하게 전세계 수많은 나라에 지역별로 구매및 소싱을 위한 전사적 관리(ERP) 소프트웨어를 론칭하는 IT프로젝트 팀의 코디네이터가 되는 것으로 시작하면 (비록 초반에는 그토록 싫어하는 어드민적인 일들을 하긴 해야하지만)그래도 이력서 상에 IT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는 근사한 한 줄을 적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알량한 생각에서 시작된 지금의 포지션이었다. 전략적 일보 후퇴라 생각하고 나는 초반만 잠시 그런 잡무를 해주는 시늉을 하다가 프로젝트 매니저가되거나 아니면 프로젝트 예산을 관리하는 컨트롤러가 되거나, IT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며, 차라리 론칭하는 소프트웨어같은 SAP계열 ERP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러면 이민자로서 직업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기에는 그저그만인 이력이 될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나를 그저 갓 대학 졸업 후 최말단으로 들어와서 프로젝트 매니저의 어시스턴트나 해주는 정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받았다. 나는 이 포지션을 시작할 무렵만해도 20대 막차를 달리는 나이였다. 나는 그간 일을 꾸준히 해온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포지션들과 선형(linear)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여, 내가 지난 포지션들로부터 가지고 올 수 있는 적용가능한 스킬들 (transferrable skillset)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리려는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불안감이 급습하기 시작했다.


뭐지? 전략적 후퇴가 아니라 그냥 총체적 후퇴로, 과거에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어시스트, 어드민으로 전락한 후퇴인거였을까?

나는 그저 말단 정도로만 본다구? 지금 나이로는 만년 쥬니어레벨이 아니라 한단계 더 도약을 해야하는데 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게 뭐지?

기존의 직책에서 선형으로 이어지지 않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포지션이라고 중고신입으로 까고 들어가나? 이전에 맡았던 IT 체인지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롤도, 프로젝트들 론칭할때마다 밀접하게 일하며 프로젝트로 인해 도입되는 변화들을 커뮤니케이션하고 프로젝트 마케팅하는 일도 했어서 지금 하는 포지션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깡그리 무시할 게 아닌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건가?


나만... 이.렇.게. 생각했던 걸까?
아무도 나따위는, 커리어적으로 좀 자리잡아보려고 분투하는 외노자, 외국 출신 직원의 몸부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겠지? 나는 망하는걸까?

 

단순 어드민 업무들만이 많이 주어졌고 안그래도 다시 과거에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어드민 & 오퍼레이션 잡무 담당자로 추락하는 것인가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린 쐐기를 박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상사는 지난 2020년 3월 말 무렵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상사: 알다시피 올해는 채용이 동결되었고, 업무적 유사성도 있으니 네가 이 업무도 겸직을 해줘야겠어.

나: 그럼, 저는 월급을 좀 더 올려받게 된다거나 어떤 다른 혜택이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을 맡고난 이력이 나중에 제 커리어적으로 어떻게 활용이 가능할 수 있게 될까요? 이 일을 지금 이렇게 비상시로 겸직하게 되었다가 나중에 어떤 보상이 생길 수 있는 건가요?

상사: ... 그건 지금으로서는 확답할 수 없고,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다들 좀 희생이 필요해.

 


사실 부서 총무가 그 앞전 해인 2019년 가을에 사직을 하고 계속해서 길어지는 공석에 이상하게도 자꾸만 약간씩 불안했었다. 팀이벤트를 어시스트하고 부서에서 총괄하는 각종 프로젝트들의 월별 비용을 정산하는 총무적인 일을 기존의 프로젝트 팀을 위해 예산 트래킹, 인보이스 관리, 프로젝트 관련 프레젠테이션 준비 등을 하고있던 내게 엮고자 하는 상사의 시도는 그나름 꽤 타당한 솔루션이었다.


그래도 마냥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정말로 팀 어시스트겸 프로젝트 어시스트 만년 "어씨"로 남아서 인보이스 상의 금액이 안맞으면 관련 담당자 쪼으고 팔로우업하고 그런 일들을 해야하고 자율적으로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도입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의 욕구와는 정반대의 잡무들만을 퇴직하는 날까지 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부서내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을 예산 대비 월별 발생 비용 트래킹을 하는 툴을 론칭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냥 비용트래킹이나 하고 어씨만 하는게 아니라, 부서내에 기존에 없던,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위한 툴과 프로젝트 진행 상태 리포팅 프로세스를 도입하는 일을 하면서 그 나름 하나의 Best Practice 기획을 해 보려고, 그리하여 프로젝트 어씨가 아니라 프로젝트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상사는 내가 떠나면 사람을 못구해서 망하는것을 알기에 내 내향적인 성향과 한번씩 문을 다시 여는 사무실에 끝끝내 출근 안하고 재택을 고수하려는 내가 짜증났겠지만 참아줬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와 가진 암묵적인 거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는 이런저런 자잘한 일들만을 하게 되며 내가 저평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휩쌓이게 되었다.

 

결국 이 우여곡절 끝에 2020년의 한 해는 저물었고, 연말에 상사는 나에게 연봉인상도 안되었고 여러가지로 희생을 하였으니 회사 내에서 퍼포먼스 좋은 직원들에게만 올해 주기로 한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고 하였다. 한화로 치면 170만원 정도 되는 월급 외의 금액이었다.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정말 감사하긴 했다. 그래도 이런 상사가 있어서 작년 한해 동안 무수히 치솟아 올랐던 퇴사욕구를 가까스러 누르며 오늘 까지 지내 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돈을 던져주고 입막음을 하며 신년에도 계속해서 나를 이런 용도로 쓰겠다는 의도이지 않는가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100일 뒤에, 내가 이 부서의 이 포지션을 맡은지 2년을 넘기게되는 5월이 될때까지 올해는 작년보다 나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예의주시 하며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매일 매일 마음이 널뛰기를 한다.

 

조금만 더 참아서 하던 일 하면서 지내볼까?
아니야, 직장생활은 정말 아닌것 같아. 마음 먹은 김에 이제는 정말 마음을 굳히자.



그래도 상사가 너를 인정해주려고 해.
상사로서 그는 참 매력적인 좋은 매니저야. 배울점이 많아.
동료들도 좋은 사람들이야.
단지 지금 하는 식의 일이 양에 차지 않는거야.


그런데 만일 네가 원하는 기획적인 업무를 하고 오퍼레이션에서 손을 떼게 되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행복할 자신 있어? 지금 하는 일 계속 해가면서 대체 커리어적으로 어떻게 되고싶은거야? 회사원생활 계속 하고싶은거야?
회사다니면 월급을 받고 이력서 상에 공백기 안생기는 장점은 있지만, 그거 이외에 정말로 사람들과 협업하고 그런 일들이 장기적으로 네가 원하는 일이 맞는거야?

남보기에 어떠한가를 따지기 전에, 너는 네 스스로가 어떤것 같아?

 

내 마음에서 이런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소란이 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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